본문 바로가기
책에서 마주친 100개의 인생(딴지일보연재물 등)

고래

by 자한형 2023. 4. 20.
728x90

책에서 마주친 100개의 인생 35: 천명관의 고래 /임관산- 인생이라는 이름의 펄프픽션

소설 고래

금복이의 탄생, 싸구려 이야기가 시작되다

이 싸구려 이야기는 한 아이의 탄생으로부터 시작된다.

뭇 남자들을 뒤돌아보게 하는 요상한 냄새(누군가는 배란기 암컷 냄새라 했고 좀 더 배운 사람들은 페로몬 냄새라 했다)를 가진 아이가 태어났고 그 아이의 이름은 금복이다. 금복이의 가슴이 복숭아만 할 때, 금복이는 달밤에 비린내가 몸에 밴 생선 장수의 삼륜차 옆자리에 올라탔다. 이로써 금복이의 다사다난한 인생은 본격적으로 막을 올리게 된다.

오래전 금복의 엄마가 아이를 낳다 죽은 이후, 그는 밤마다 욕정과 홀로 싸워야 하는 외로운 수컷이었다. 그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피붙이를 끔찍이도 사랑했지만 금복이 조금씩 여자의 태를 갖춰가기 시작하자 홀아비의 음욕은 자신도 모르게 딸에게로 향하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일찍 돌아온 홀아비의 눈에 금복이와 이웃집 소년이 시시덕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금복이는 저고리를 벗고 작은 가슴을 드러내고 있었고 소년은 조심스레 탐색하다 드디어 떨리는 손을 가슴에 대려는 참이었다. 홀아비의 눈깔이 뒤집혔다. 낫을 든 그 눈깔에는 질투의 불길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소년은 도망쳤고 금복이는 모진 매질을 당했다. 그 여린 몸뚱이에서 살이 터지고 피가 튀었다.

어디선가 생선 냄새와는 다른 이상한 향기가 바람에 실려 왔다. 뒤이어, 남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은 한 어린 계집애가 손에 작은 보따리를 들고 쭈볐거리며 다가왔는데, 삼륜차 불빛에 자세히 보면 엉덩이도 제법 통통한데다 이제 막 소녀티를 벗어나려는 중이어서 생선 장수의 눈엔 그저 마냥 어린 계집애로만 보이지는 않았다.

시큼한 냄새나 풍기는 노인네들만 사는 산동네의 유일한 외지인 방문객. 그 노인네들이 환장하는 소금 덩어리 고등어 등을 삼륜차에 싣고 다니는 생선 장수 옆자리에 금복이가 앉았다. 하늘에 휘영청 둥근 보름달이 떴고 등짝에는 자신을 떠미는 듯한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금복이는 마을을 떠났고 다음 날 마을 저수지에서는 홀아비의 시체가 떠올랐다. 사람들은 질투에 눈이 먼 금복의 엄마가 그를 데려갔다고 수군댔다.

생선 장수를 따라나선 금복이 앞에 새 사내가 나타나다

난생처음으로 산동네를 벗어나 부두라는 곳에 도착한 금복이. 그날 밤 생선 장수는 어둠 속에서 조심스럽게 금복이의 옷을 벗겼다. 금복이는 생선 장수 몸에 밴 독한 비린내 때문에 숨쉬기도 힘들었지만, 그냥 가만히 참고 있었다. 이것이 생선 장수가 베푼 호의의 대가일 터이니 금복이는 참을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흘러 이제 금복의 가슴은 성난 복어처럼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고 엉덩이는 안반짝만하게 벌어졌다. 금복의 냄새는 더욱 진해져 부두의 진한 생선 비린내 속에서도 지나가는 남정네 누구라도 돌아보게 할 때였다. 그날따라 금복은 잠들 수 없었다. 생선 장수는 늘 그렇듯 금복의 배에 올라 몇 번 몸을 꾸물거리다 슬그머니 내려와 혼자 곯아떨어졌다. 금복은 밖으로 나갔다. 해안엔 희미한 달빛 아래 파도가 부서지고 있었고, 금복이 고향을 떠나던 날 등을 떠밀던 그 바람이 불고 있었다.

몸길이만도 이십여 장에 가까운 고래는 등에 붙어 있는 숨구멍으로 힘차게 물을 뿜어냈다. 분수처럼 뿜어올려진 물은 달빛 속에서 은빛으로 눈부시게 흩어졌다. 그녀의 배 한복판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그것은 죽음을 이겨낸 거대한 생명체가 주는 원초적 감동이었다.

고래를 보았다. 금복은 저고리와 치마를 벗고 알몸으로 물속에 들어갔다. 뜨겁게 달아오른 몸을 차가운 파도가 휘감았다. 금복은 파랗게 빛나는 고래를 향해 헤엄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헤엄쳐도 고래를 만질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고래는 유유히 꼬리를 흔들며 물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상실감에 빠진 금복이 앞에 다른 고래, 만질 수 있는 고래, 걱정이가 나타났다.

부두의 역사(力士) 걱정이, 금복이와 함께 하다

금복이 자리 잡은 부두에는 거대한 장골(壯骨)의 역사(力士)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걱정이었다. 걱정이의 키는 팔 척이 넘었으며 검게 그을린 그의 구릿빛 팔뚝은 웬만한 사내의 허벅지보다 굵었다. 그의 뱃구레는 어린애쯤은 뛰어놀아도 좋을 만큼 넓었고 그는 한 끼에 커다란 주발에 담긴 고봉밥 다섯 주발, 삶은 돼지고기 두 근과 막걸리 한 말을 먹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배를 가만히 만져보며 거대한 생명체의 울림을 손끝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손끝을 통해 느껴지는 진동에 온몸이 떨리고 아랫도리가 뜨거워지는 듯했다.

사업가 기질 다분한 금복이는 생선 장수를 채근해 덕장을 차렸다. 덕장은 장사가 잘되어 사람들로 붐볐다. 그러던 어느 날 금복이 앞에 걱정이가 나타났다. 자신의 덕장에 나타난 이 거대한 사내의 모습에 넋이 나간 금복이는 선술집에서 무시무시하게 먹어 치운 걱정이가 하역부 숙소에서 웃통을 까고 낮잠을 자고 있을 때, 그의 배 위에 손을 얹었다. 낮잠을 자는 그의 배는 숨 쉴 때마다 거대한 파도처럼 오르내렸고 금복이는 매혹됐다. 그리고 눈을 뜬 걱정이는 달뜬 금복이의 얼굴을 확인했다.

어느 날 걱정이가 금복이의 덕장으로 찾아왔고 금복이는 걱정이를 따라나섰다. 이것은 늙은 생선 장수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금복이의 허기를 달래줄 그 무엇도 없었다. 걱정이는 자신에게 저항하는 생선 장수의 멱살을 잡아 번쩍 들었다가 다시 땅에 내려놓았다.

금쪽이는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넋 나간 표정의 생선 장수를 뒤로하고 금복이는 걱정이를 따라갔다. 이것은 금복이가 생선 장수를 따라 이 부두로 온 지 삼 년 뒤의 일이다.

그의 순박함을 사랑했으며 거대한 고래에 매료된 것처럼 단숨에 걱정의 육체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마침내 둑이 무너졌고 걷잡을 수 없는 봇물이 쏟아져 내렸다. 걱정이가 변강쇠라면 금복이는 옹녀였다. 금복이는 부끄러움과 미숙함을 버리고 온몸을 걱정을 향해 활짝 열어젖혔다. 그리고 금복이의 냄새는 더욱 진해졌다.

손가락 네 개뿐인 사내의 등장

희대의 사기꾼이자 악명 높은 밀수꾼에 그 도시에서 상대가 없는 칼잡이인 동시에 호가 난 난봉꾼이며 모든 부둣가 창녀들의 기둥서방에 염량 빠른 거간꾼인 그는, 부둣가 도시에서 벌어지는 모든 더러운 일에 빠짐없이 연루되어 있었다.

손가락이 네 개뿐인 건달이 부두의 암흑가를 장악하고 있었다. 아무도 그의 이름을 몰랐다. 단지 얼굴에 길게 그어진 칼자국이 있으니 칼자국이라 칭할 뿐이었다. 이 부둣가 도시에는 신실한 믿음으로 무장한 전도사가 하나 있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김으로써 오래오래 기억되는 영광을 누렸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칼자국의 것은 칼자국에게.

오직 깡 하나로 일본으로 밀항해 야쿠자들 밑에서 어떻게 칼을 꽂아야 단숨에 숨통을 끊을 수 있는가를 배우는 열여섯 살의 소년 앞에 하얗게 분칠한 얼굴의 게이샤, 나오코가 나타났고 외로운 소년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소년은 너무 어리고 정식 조직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소년은 자신의 칼을 꺼내 손가락 하나를 잘라 나오코에게 내밀었다. 자신을 기억하라고 했다.

...이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