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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마주친 100개의 인생(딴지일보연재물 등)

고래2

by 자한형 2023.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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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2/임관산

세월은 흘렀고 소년은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드디어 라이벌 조직원에게 칼을 꽂아 정식 야쿠자가 되었다. 입단식에서 손가락 하나를 잘라 충성을 맹세한 그는 여덟 개의 손가락으로 다시 나오코를 찾았다.

한참 후 그를 기억해낸 나오코는 다시 거절했다. 그가 아직은 자신을 보호할 힘이 없다는 것이었다. 어른이 된 소년은 다시 그녀 앞에서 손가락 하나를 잘랐고 늘 앞장서 칼을 휘둘렀다. 조직의 이인자가 된 그를 나오코는 또 거절했다. 그녀가 원한 것은 오야붕이었다. 그는 다시 손가락 하나를 잘라 그녀에게 바쳤다.

세월은 흐르고 상사의 고통은 더 심해져 갔다. 그는 결단을 내렸다. 그는 라이벌 조직의 표식이 새겨진 칼을 오야붕의 가슴에 꽂았다. 그리고 사죄의 의미로 그 시체 앞에서 손가락 하나를 잘랐다. 이후 두 조직 간의 치열한 전쟁을 주도했고 끝내는 승리하여 드디어 오야붕이 되었다. 다섯 개의 손가락만 남은 그, 칼자국은 다시 그녀를 찾았다. 드디어 그녀는 허락했다.

칼자국은 자신의 사랑이 이루어진 것에 감동과 희열을 느꼈고 밤새 몇 번씩이나 쾌락의 절정에 도달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자신의 품에 안겨 잠든 나오코를 보았을 때 그만 뒤로 벌렁 자빠지고 말았다. 하얀 분칠이 지워진 나오코는 축 늘어진 젖가슴과 주름투성이 얼굴을 가진 늙은 여자였기 때문이다. 그간의 세월이 칼자국의 다섯 개 손가락과 나오코의 젊음을 앗아간 것이었다.

띠발... 다시는 사랑을 하지 않겠노라

칼자국은 다시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겠노라는 맹세를 하며 다시 손가락 하나를 잘랐다. 여섯 개의 손가락과 비극적 사랑을 가슴에 묻고 칼자국은 조국으로 돌아와 부둣가 도시 밤거리의 지배자가 되었으나 그 맹세는 지켜지지 못했다. 금복이 칼자국의 극장에 나타났을 때, 칼자국은 금복에게서 나오코의 냄새를 맡았다. 칼자국은 두 개밖에 없는 손가락이 달린 손으로 금복의 손목을 쥐었다.

일 톤짜리 밥벌레가 된 걱정이

거대한 태풍이 부두를 덮친 날이었다. 태풍에 쌓아놓은 통나무 더미가 무너져 인부들을 덮칠 때였다. 걱정이는 자신의 몸으로 그 통나무를 막았다. 위대한 힘이었다. 그 큰 통나무가 걱정이의 가슴과 팔 앞에서 멈추고야 말았다. 그러나 인부들이 환호성을 지를 때, 더 크고 더 많은 통나무들이 걱정이를 덮쳤다. 걱정이는 무너졌다.

이름을 알지 못하는 그대. 스스로 완전한 존재여. 나의 모든 것, 내 모든 비밀과 기쁨, 내가 걸어온 모든 발걸음, 내 모든 피와 살을 들어 바라건대 부디 이이를 구해주소서. 그 대가가 무엇이든 기쁘게 받겠나이다.

목 병신 다리 병신이 되었고 밤마다 고통에 시달려야 했으며 지능은 점점 더 낮아지는 걱정이 앞에서 금복이는 빌고 또 빌었으나 걱정이는 오직 그 무시무시한 먹성만이 남은 밥벌레가 되었다. 그리고 걱정이의 몸무게가 오백 킬로그램에 육박할 때, 그의 성기가 완전히 살 속에 묻혀 보이지 않을 때, 그가 싸재끼는 어마어마한 양의 배설물을 대형 요강이 감당하지 못할 때, 더 이상 금복이에게 먹을 것을 살 돈이 없었을 때, 그래서 오직 칼자국의 도움만으로 살아갈 때, 금복이는 칼자국 앞에서 옷을 벗었다.

그자는 당신을 이용하고 있어. 만일 당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나는 그자를 당신으로부터 영원히 분리해놓을 수도 있어.

걱정이의 몸뚱이가 이제 일 톤에 육박할 때였다. 금복이는 칼자국 제안에 치를 떨었다. 그리고 파란 불길이 이는 듯한 눈빛으로 칼자국에게 말했다. 그런 일이 생긴다면 혀를 물고 죽겠다고.

두 사내와 이별하다

온갖 잡귀가 울어대는 것처럼 바람 소리가 시끄러운 밤, 걱정이는 바람 소리에 잠을 깼다. 걱정이는 자신의 살덩어리들 앞에서 절망에 빠졌다. 그리고 몸을 움직이려고 용을 썼다. 부둣가 최고의 역사였던 그였다. 비곗덩어리 속의 근육이 꿈틀대며 마침내 온몸을 휘감고 있는 거대한 살덩어리를 들어 올렸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그가 본 것은 금복이가 알몸으로 낯선 사내를 껴안고 잠들어 있는 모습이었다. 걱정이는 뱃가죽을 바닥에 질질 끌며 힘겹게 부둣가로 걸어갔다. 온 힘을 다했다. 길바닥에 비벼지는 뱃가죽에서 피가 흘러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걱정이를 깨운 바람 소리가 금복이도 깨웠다. 잠에서 깬 금복이는 강렬하게 다가오는 불길한 예감에 허겁지겁 걱정이를 찾았으나 걱정이는 보이지 않았다. 칼자국도 보이지 않았다. 금복이는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부둣가로 달려갔다. 금복이의 눈에 칼자국의 등이 보였고 그 너머로는 거대한 파도가 보였다. 금복이는 증오심에 눈이 멀었다.

배에 와 닿는 금속성의 낯설고 차가운 느낌, 뱃가죽이 찢어지는 순간의 엄청난 혼돈과 날카로운 고통, 내장기관들을 관통하며 지나가는 작살의 부드러운 직선 이동과 이물감, 등뼈를 스치며 마침내 쇠꼬챙이가 등을 꿰뚫고 나갈 때의 공포와 결국은 끝났구나 하는 어이 없는 안도감, 그리고 뒤이어 밀려오는 엄청난 공복감......

작살에 관통당한 칼자국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모든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무릎을 꺾으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지막으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걱정이는, 내가 죽이지, 않았어. 그는 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거야......

평대에서 시작하는 새 인생

이름은 평평하나 너른 벌 하나 없고

이름은 집터로되 사람 살 집 아니로다

...... , 이 개새끼들아! 그만 좀 짖어!

평대, 이름으로만 짐작하면 너른 들판과 기와집들이 모여 있는 넉넉한 마을 풍경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민망한 너새집 서너 채에 제대로 된 밭뙈기 하나 없었으니 완전히 세상과 고립된 벽촌 중의 벽촌이다. 밥 한 끼, 술 한 잔이라도 얻어먹을까 했던 어느 방랑 시인의 분노가 그가 남긴 시 속에 고스란히 살아 있다.

철도가 평대와 평대 사람들의 삶을 바꾸었다. 이 궁벽한 벽촌을 관통하는 철도가 들어서면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일거리를 찾아 몰려드는 인부들, 건설회사 직원들, 그들을 상대로 한 술집과 음식점들, 그리고 그들의 외로움을 달래 줄 작부들. 공사 중에 다친 사람들이 있으니 병원도 들어섰고 그들의 영혼을 위로해 줄 교회도 들어섰다. 평대에 빅뱅이 시작되었다.

이 빅뱅의 혼란한 와중에 한 여인이 평대로 흘러들어왔다. 칼자국을 죽인 후 사 년을 거지들에게 몸을 팔면서라도 버티고 버텨 끝내 살아낸 금복이였다. 그녀는 폐허가 된 평대역 근처 국밥집을 개조해 평대다방을 차리고 영업을 시작했다. 평대 최초의 다방이었다. 매혹적이고 슬픈 듯 관능적인 여주인 덕에 다방은 곧 모여드는 손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북적북적

여주인은 미친 듯이 그리고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간혹 돈 자랑과 함께 추파를 던지는 남정네들도 있었으나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오직 돈, 돈만이 그녀의 유일한 관심사였다. 평대다방의 여주인은 아버지, 첫사랑, 그리고 두 번째 사랑까지. 세 명의 남자를 죽게 한 금복이였다.

금복의 나이도 어느덧 삼십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그녀의 삶에서 젊음은 모두 지나가 버렸으며 가장 뜨거웠던 시간으로부터도 점차 멀어지고 있었다....... 그사이 칼자국과 걱정에 대한 기억도 점차 멀어져 이젠 얼굴조차 희미한 상태였다.

고래극장의 오픈 그리고 다사다난했던 인생의 종지부

초대된 귀빈들이 테이프를 끊는 절차를 마치고 줄을 잡아당기자 마침내 휘장이 걷히면서 베일에 가려졌던 극장의 전모가 드러났다. 거대한 고래가 막 물에서 뛰쳐나온 듯 꼬리를 한껏 치켜든 극장의 모습은 군중들이 상상했던 이상의 놀라움을 안겨주어 그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성을 질렀다.

평대역 앞, 평대에서 가장 번화한 곳에 고래극장이 그 위용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젠 평대의 유력인사가 된 금복이 감격에 겨워하며 모여든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했다. 금복은 자신의 다사다난했던 인생의 종지부를 찍고 있었다. 이날을 위해 금복은 여성까지 버렸다. 나이를 먹으며 호르몬의 변화가 가져온 영향도 있었겠으나 금복은 스스로 남자가 되었다.

금복이 어린 날 낯선 부둣가에서 보았던 고래의 그 거대한 모습. 고래는 얼굴도 모르는 엄마의 죽음과 아버지의 자살, 그리고 비참하게 죽어간 두 남자의 죽음에 맞서는 영원한 생명이었다. 이제 두려움 많았던 묘한 냄새의 소녀는 냄새가 사라진 나이에 남자로 변신하여 드디어 자신의 인생에 드리워진 가장 큰 공포에 맞서 승리했음을 선언하게 된 것이다.

올 것은 결국 오고야 만다. 아무런 전조가 없이도. 그것은 운명의 법칙이었다.

이대로 끝난다면 제대로 된 펄프픽션 - 싸구려 소설, 삼류 소설을 의미 - 이 아니다. 끝난 것 같았던 금복의 다사다난한 인생에 가장 큰 저주가 남아 있었다.

평대 유일의 극장, 고래극장은 그날도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관객은 좌석을 모두 채우고도 모자라 통로까지 빼곡히 점령했다. 극장 안은 관객이 뿜어내는 열기로 후끈거렸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관객들은 어디선가 희미한 휘발유 냄새를 맡은 듯했다. 그것은 바로 전날 밤, 극장에서 잠을 자던 영사기사가 난로 기름통을 들고 가다 그만 의자에 걸려 넘어지며 바닥에 쏟은 것이었다.

금복은 귀빈석에서 가득 찬 관객들의 모습을 뿌듯하게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기 위해 라이터를 꺼냈다. 칼자국이 남긴 유물이었다. 술에 취한 상태였던 그녀는 그만 라이터를 떨어뜨렸다. 순식간에 극장은 지옥이 되었다. 질식의 고통에 울부짖는 사람들, 이리 밀리고 저리 쓰러지며 짓밟히는 사람들, 그리고 몸에 불이 붙어 미친 듯이 바닥을 뒹구는 사람들. 세상에 다시없는 참혹한 광경이 펼쳐졌다.

금복은 일렁이는 불꽃 속에서 취한 눈으로 스크린을 응시했다. 평생을 죽음의 공포로부터 도망쳤으나 마침내 자신에게도 죽음이 찾아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무모한 열정과 정념, 어리석은 미혹과 무지, 믿기지 않는 행운과 오해, 끔찍한 살인과 유랑, 비천한 욕망과 증오, 기이한 변신과 모순, 숨가쁘게 굴곡졌던 영욕과 성회는 스크린이 불에 타 없어지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함과 아이러니로 가득찬, 그 혹은 그녀의 거대한 삶과 함께 비눗방울처럼 삽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인생이라는 이름의 펄프픽션

의미가 있으니 소중한 것일까요, 소중하니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까요. 한 번뿐인 인생이다 보니 참으로 소중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에 무언가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숙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생각보다 별 의미가 없습니다. 우연히 인간으로 태어나 살다 보니, 살아내다 보니 어느 날 죽음이 찾아옵니다. 80억 명의 사람 중에서 죽는 순간에 내 인생은 참으로 의미가 있었어, 난 만족스럽게 죽음을 맞이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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