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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속 마음의 정화 (4권)

최영장군 묘를 참배하며넉

by 자한형 2023.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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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장군 묘를 참배하면서

 

 

얼마 전 한파가 절정으로 치닫던 날이었다. 사무실 직원들과 오랜만에 외식을 하러나갔다. 전날 회식이 있어 제법 술을 마신 후였기에 해장을 한답시고 인근의 대구탕 집을 찾았다. 여러 가지 메뉴 가운데 단연 인기가 있는 것은 생대구탕이었다. 가격도 꽤 비싼 편이었다. 주재료인 생대구가 구간이라는 것이 고객들의 선호도를 높여주었고 주문이 넘치는 주 종목의 메뉴였다. 미리 예약을 해두었고 끓여놓았던 터라 바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도 나름의 여유가 있어 인근의 최영장군 묘를 둘러보기로 했다. 이정표를 쫓아 제법 올라왔다고 생각했는데 쉽게 찾을 길이 없었다. 눈대중으로 묘역 비슷한 곳을 뒤적이다보니 그럴 듯해 보이는 곳을 한군데 찾아서 무작정 올라가다 보니 그곳은 얼토당토않은 성령대군의 묘역이고 사적지였다. 묘역 앞쪽으로 사당 같은 건물이 이어져 있었고 뒤편으로 묘역이 아주 잘 단장되어있었다. 태종의 넷째아들이고 세조의 동생으로 14세에 홍역으로 인해 돌아가신 대군이었다. 부인의 묘도 있었고 대군의 묘역답게 잘 관리되고 보존되는 듯했다. 제법 찬바람이 불고 있었고 얼마 전 내린 눈의 흔적이랄 수 있는 잔설이 고스란히 드문드문 남아 있었다. 인적은 드물었고 차도 거의 지나다니지 않는 외진 곳이었다. 아무튼 장군의 묘역을 찾아야했기에 지나가는 차를 급히 세워놓고 장군의 묘역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좀 전에 되돌아 나온 막다른 길에서 걸어 올라가야 한다는 것을 설명 듣고 다시 좀 전에 빠져 나왔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차를 주차해 둔 후에 주변을 살폈다. 조그만 팻말에 장군의 묘역에 관한 안내 표식이 있었다. 좀 전의 성령대군의 묘역과 참 대비되는 부분이었다. 그곳에서 600미터를 더 올라가야 하는 곳에 묘가 있었다. 가파른 산길을 10여분을 올라가니 묘소 입구에 표식이 있고 안내 표지판이 나왔다. 돌로 된 계단이 죽 이어져 있었다. 장군의 아버지 가르침 중에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라는 경구가 있었다. 청렴결백한 공직자로서의 기본자세를 깨우쳐준 것이었다. 고려 말 홍건적을 이방실 장군과 함께 물리쳤으며 제주도 민란도 평정하였고 왜군의 침략도 봉쇄한 역사에 길이 남은 업적을 세운 장군이었다. 묘역을 둘러보니 장군의 묘위에는 장군의 아버지이셨던 최원직 님의 묘가 위치하고 있었다. 고려의 혼란했던 말기에 고려를 지키기 위해 멸사봉공의 자세로 최선을 다했었지만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릴 수 없었던 비운의 운명을 가졌었다. 이성계 등의 신진 사류 무리들이 명나라와 요동을 정벌하기 위해 출격할 때 고려왕을 지켜야 한다는 지엄한 명에 의거 궁궐에 남아 있었던 장군은 결국 신흥 세력의 위화도회군에 의해 졸지에 권력에서 몰락하는 운명을 맞았다. 유배를 당해 위안리치 당하고 결국은 억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비장한 각오로 죽음을 맞이한 장군은 그런 유언을 남겼단다. 자신에게 허물이 없다면 자신의 무덤에 풀이 나지 않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풀이 날 것이라고 했단다.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풀이 나지 않았단다. 그 이후부터 풀이 났다고 하니 그의 유언은 허언이 아니었던 듯하다. 73세까지 천수를 누렸지만 억울하게 생을 마감했고 말년에는 문하시중까지 올랐을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구가하기까지 했었지만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바꾸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이성계(태조)도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안타까워했고 비통해 했었다. 그는 조선초기의 남이장군과 더불어 무속인들에게도 숭배의 대상으로 추앙받고 있다. 고려 말 충신 삼인 중에 한명이었던 야은 길재의 시조에 오백년 도읍지를옮겨본다.

 

오백년 도읍지를
                  길재

오백년 도읍지(都邑地)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山川)은 의구(依舊)한데 인걸(人傑)은 간데 없네
즈버 태평 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고려 말의 태평성세가 이제는 끝나고 새로운 이조시대로 변화되어 개성을 말을 타고 돌아보았더니 산천은 변함이 없는데 그 예전 인재와 준재들은 다 어디가고 없구나 아 태평성대의 옛 고려의 그 아름다웠던 시절이 꿈같이 그립구나 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인걸 중의 한사람이 최영장군이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장군묘를 돌아본 다음날에 우연찮게 또다시 그곳을 찾게 되었다. 그것은 공교롭게도 같이 식사를 하게 된 이들이 죄다 최씨였고 그들의 선조라고 우겼고 그것이 빌미가 되어 다시 또 장군의 묘역을 찾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는 그곳을 제대로 알아서 찾아 참배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약주를 준비해 가지고 갔다. 안내도 일사천리로 할 수 있었다. 참배를 온 후손들은 정중히 술을 따르고 참배를 했다. 장군의 아버님부터 장군까지 순례를 하고 참배를 했다. 옆에서 안내를 했던 우리도 울며 겨자 먹기로 참배를 하기에 이르렀다. 한 시대를 풍미했고 일세를 구가했던 구국의 영웅이었던 이가 이제는 한줌의 준토가 되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일개 범부로 살아가는 이로서는 더없이 존경스럽고 흠모해 마지않는 분의 묘를 참배하면서 감회가 새로웠다. 쓰러져가는 왕조를 지키고자 애를 쓰고 혼신의 힘을 다했지만 결국은 역사의 큰 물줄기를 바꾸진 못했던 것이다. 대하처럼 도도히 흐르는 흐름은 결국 그렇게 순리를 쫓아서 흘러가게 마련인지 모를 일이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리는 사람은 엄청난 의지와 역량을 가지고 역사의 흐름을 되돌릴 것이다. 이제 지나고 보면 참으로 부질없는 망집에 휩싸였던 것이 아니었던가 하고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그 시대를 산 이들로서는 그 상황에서는 최선을 다했다고 항변할 수 있으리라. 역사는 강물처럼 그렇게 대의를 향해 꿋꿋하게 흘러갈 것이다. 어떤 것이 정의이고 어떤 것이 순리인지는 역사를 배우면서 스스로 터득해 갈 수밖에 없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릴 수 있는 자만이 역사 속에서 주체자일 수 있을 것이다. 주체자의 위치에서 역사의 수레바퀴는 아무나 누구에게나 허용되는 그런 부분은 아닐 것이다. 역사는 대의를 쫓아서 순응해가고 크나큰 섭리 속에서 흘러가는 것이리라. 화엄경에서 이렇게 쓰여져 있다. “나무는 꽃을 버리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고 강은 강물을 버리지 않으면 바다에 이를 수 없다.” 지고지순한 가치의 실현을 위해서는 자기를 버리는 그런 희생위에서 꽃피울 수 있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최영장군의 숭고한 뜻을 되새기면서 그 거룩한 정신이 빛날 수 있도록 오늘을 새롭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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