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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학교교육과 교육자의 위상

by 자한형 2024. 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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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교육과 교육자의 위상/최동식 (학교법인 인덕학원 이사)

어느 중학교의 담임교사가 칠판에 필기를 하고 있고 그 옆에 한 학생이 누워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사진을 찍고 있는 듯한 동영상이 널리 유포된 일이 있었다. 보는 이들로 하여금 한심스럽다 못해 경악을 느낄 만큼 참담한 학교교육의 모습을 목격하는 순간이었다. 학생의 태도도 상상할 수 있는 한계를 넘었거니와 아랑곳없이 판서만 하고 있는 교사의 자세도 불가사의하긴 마찬가지였다. 학교가 제 역할을 못 하고 교사의 권위가 추락하였으며 학생들은 통제가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는 한탄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거니와 이 동영상은 적어도 그 실상의 일단을 엿볼 만한 것이었다.

일부 몰지각한 학부모들의 폭력적 행태와 방임에 가까운 철없는 어린 학생들의 무질서하고 버릇없는 언행들 그리고 진보와 민주화를 내세우는 정치성이 농후한 교사들의 이데올로기적 선동이 어우러져 학교교육이 황폐해져 가고 있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는 상황에서 이 동영상은 가히 한국교육의 한 단면을 말해주기에 충분하였다.

무릇 사람을 가르치는 일은 반드시 가르치는 사람의 권위가 전제된다. 지식이든 기술이든 또는 인격과 덕성에 관한 가르침이든 가르치는 사람의 특별한 역량에 대한 권위가 인정될 수 있어야 학습자들의 관심을 모으고 기대하는 바의 교육효과도 거둘 수 있는 것이다. 교육자의 교수행위가 이웃집 아저씨나 거리를 지나는 행인들 중의 아무개와 별로 다를 것이 없다고 간주되는 상황에서는 결코 교육다운 교육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 권위는 지적인 것일 수도 있고 특별한 재능이나 경력 또는 남달리 돋보이는 인간적 탁월함과 뛰어난 지혜일 수도 있다. 어느 부분이든 그 분야와 관련된 실력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권위가 있지 않으면 교육의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광주와 세월호 이태원 등의 불행한 사건들을 겪으면서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 심화되고 소위 민주화라는 명분으로 진실과 허위의 진상이 가려지는 굴곡의 세월을 지나왔다. 반세기가 훨씬 넘도록 무력적화 통일의 기도를 일관되게 추구하고 있는 북한과 마주 대치해 있는 상황에서 남한 내부의 갈등이 극한으로 치달려 온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보편적 정의는 사라져가고 나에게 또는 우리 편에게 유리한가 불리한가를 따지는 저울질이 옳고 그름의 판단기준으로 작용하는 막보기의 사회가 되어가고 있음을 본다. 이러한 갈등상황과 특수적 판단기준이 교육의 현장에 고스란히 녹아들어왔다는 생각을 하면 소름이 끼칠 듯한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는 언젠가 한반도가 평화적으로 통일되어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분단국가의 오명을 씻고 민족 전체가 자유로운 정치환경 속에서 진정한 형제애를 나누며 오순도순 살아가는 날이 오기를 바라는 염원이 자리하고 있다. 오늘의 기성세대가 비록 분단의 유산을 온몸으로 감내하면서 그 아픔을 가슴에 안고 살지라도 우리 후손들이 살아갈 미래의 세상에서만은 이러한 민족적 염원이 꼭 성취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특히 교육에 기대를 거는 이유는 훌륭한 교육을 받고 자라나는 성장세대가 우리의 간절한 이 소망을 성취해 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크기 때문이리라. 아마도 한국인의 교육열이 유난스럽다는 평가를 받는 것은 이러한 미래에 대한 간곡한 염원에 기인하는지도 모른다.

학생들의 인권과 학습권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어서 굳이 강조할 이유가 없거니와 그러한 주장이 학생신분으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절도와 예절을 저버리는 행위까지 용납하는 방임의 수준이 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무엇이 이 어린 학생으로 하여금 이러한 방자한 태도를 거침없이 표출하도록 용납하고 있는가? 누가 이 교사로 하여금 학생의 못된 행동을 저지하기는커녕 모르는 척 무관심하게 만들고 있는가?

학교교육의 본질은 교과수업에 있다. 한때 소위 인성교육이라는 것이 교과수업보다 더 중요하다는 인식이 교육현장을 뒤덮었던 시절도 있거니와 교과수업이 소홀히 되는 한 학교교육의 존재이유는 반감될 수밖에 없다. 신임 교육부장관이 취임 일성으로 교실수업 개혁을 강조한 것도 교사의 책무와 맥락이 이어지는 언급이라고 볼 수 있다. 교과수업을 탁월하게 하지 못하는 교사는 결코 훌륭한 교사로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이다.

국가의 교육예산이 복지예산 다음으로 최우선 순위를 점할 만큼 막대한 공교육비를 지출하고 있음에도 사교육비 지출이 줄기는커녕 늘어만 가는 이유는 바로 학교교육 특히 교과수업이 기대에 못 미치기 때문일 것이다. AI 등 첨단의 교육시설과 기자재들이 학교교육의 모습을 놀라울 만큼 바꿔놓고 있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변화이지만 이러한 물리적 환경의 변화가 곧바로 교육발전일 수는 없는 일이다. 첨단의 기자재는 물론 AI까지도 이를 활용하는 것은 인간의 생각이고 아이디어이고 정신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의지와 습관을 교정하는 일은 교사의 가르치는 역할 중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고 보아야 옳지 않겠는가?

배우는 과정의 학습자들에게는 인권과 학습권 등 모호한 이데올로기적 주장에 앞서 철저한 생활훈련의 과정을 통하여 배우는 자로서의 의무와 임무에 충실하는 자세를 견지할 것이 요구된다. 자유가 방임이 되고 인권이 월권이 되며 학습권이 공격의 빌미가 되면 학교는 질서를 잃고 통제불능의 상태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학생들을 선동해서 정치집회에 모으고 참석하는 학생들에게 봉사점수를 부여하고 이러한 집회를 여는데 소요되는 비용을 행정기관이 보조하고 있다니 이는 명백한 직무유기이고 반교육적인 음모이다. 판단능력이 성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것은 매우 위험스러운 일이며 비교육적임은 물론 일종의 죄악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자라나는 세대에게 우리가 겪고 있는 이 공허한 이데올로기 투쟁의 불행한 유산을 남겨주고 싶은가를 진지하게 자문해야 할 때인 것 같다.

교사들은 자유민주주의 교육철학과 소신으로 책임 있게 학생들을 지도해야 하며 정부와 학부모와 온 사회는 교사들의 소신 있는 지도를 뒷받침 할 수 있도록 제도적인 장치를 보완하는데 마음을 써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동영상에 나타난 교사와 학생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학교가 무너지면 나라의 장래도 크게 기대하기 어려울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의 일이다.

무운심심한 사과

지난해에는 한 젊은 정치인이 평소에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던 상대에게 무운(武運)을 빈다라고 차갑게 전한 메시지를 어느 방송기자가 부디 행운(幸運)이 없기를 빈다고 직역하여 항간에 얘깃거리를 던지더니 얼마 전에는 한 유튜브에서 심심(甚深)한 사과운운한 말을 놓고 무슨 사과를 그리 심심하게 하느냐” “제대로 된 사과를 해야 옳지, 도대체 심심한 사과를 왜 하느냐는 항의가 빗발쳐서 또 한 번 웃음 반 우려 반의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깊이 진심을 담아 사과드린다는 뜻을 대수롭지 않은 일이니 그냥 조금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정도의 가벼운 사과로 해석한데서 빚어진 해프닝이었다.

학교가 전혀 한자교육을 실시하지 못하는 형편이니 젊은 세대가 한자실력은 물론이고 덩달아 한글 이해력과 표현력에도 상당한 문제를 노출시키는 것 같다. 실질문맹률이 90%를 넘는다는 주장이 그냥 하는 빈말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한글의 우수성은 재삼 논할 필요가 없거니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우수성 때문에 오히려 한자를 익힐 필요성을 느끼지 못함으로써 소리글자로서의 한글이 가지는 한계를 쉽게 극복하지 못하고 있지 않나 여겨진다. 국문학자의 조사에 따르면 한글 어휘의 70% 이상이 한자에 기반한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자에 대한 얼마간의 소양이 없으면 한글 운용능력이 좁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영어나 독일어 프랑스어 등 서양어는 역시 소리글자이긴 하지만 그 어원인 라틴어 역시 소리글자이기 때문에 어원을 특별히 알고 있어야 할 필요성이 우리 한글처럼 크지 않아 보인다. 한자는 뜻글자이고 한글은 소리글자이면서 많은 어휘들이 이 뜻글자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같은 소리를 내도 뜻은 전혀 다른 경우가 적지 않다. 전문서적이나 학술논문에서 괄호 안에 한자를 병기함으로써 의미전달을 명확하게 하는 경우가 종종 있거니와 일상의 언어생활에서도 한글어휘 만으로는 의미전달이 모호하여 헷갈리는 경우가 드물지 않은 것이다.

문장의 앞뒤 문맥을 살펴보고 같은 어휘가 갖는 여러 의미 중에서 적절한 선택을 할 수 있어야 그 문장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데 그것은 한자에 대한 어느 정도의 소양을 갖추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건국 이후 줄곧 한글전용정책을 써왔고 지금도 여전히 고수하고 있는데 이러한 어문정책이 낳고 있는 여러 부작용을 면밀히 검토해 보아야 할 시점에 이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글의 우수성과 실용성 특히 배우기 쉬운 점 등을 들어 한글전용을 굳이 주장하는 입장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만 초·중등학교에서 한자교육을 조금만 정성들여 시키면 여러 가지 장점이 생기는 것을 고려할 때 기초한자를 얼마간 가르칠 수 있도록 유연성 있게 어문정책을 수정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한자교육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장점은 우선 한글의 의미를 보다 정확히 파악할 수 있고 우리말 사용에 있어 표현력을 높이는 동시에 어휘력을 증진시킬 수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요즘엔 인터넷은 물론 각종 시청각 학습 자료들을 통해 쉽고 재미있게 배우는 환경이 갖추어져 있어서인지 어린이들이 깜짝 놀랄 만큼 풍부한 어휘를 일찍부터 구사하는 신기한 현상들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이런 어린이들에게 기초적인 한자를 익히게 하면 보다 정확하게 우리말을 구사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지 않겠는가.

제도권 교육이 한자교육을 하지 않기 때문에 한자의 중요성을 절감하는 학부모들의 열망을 사교육이 보완하게 되면서 학부모들은 과중한 교육비를 지출할 뿐만 아니라 성장세대의 지적 능력의 격차도 커지고 있는 것이다. 학부모들 중에는 한자를 익히면 어린이들의 언어이해력과 구사능력 그리고 사고력이 증진될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사교육비를 지출해서라도 한자를 가르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매년 정기적으로 실시되고 있는 한자급수 시험에 많은 어린이와 학생들이 꾸준히 참여하고 있는 것은 그 증거이다. 학교에서 이를 커리큘럼으로 채택하거나 교과서에 병용하여 가르치면 보다 많은 학생들이 재정적 부담을 하지 않고도 교육효과를 거둘 수 있지 않겠는가?

한자를 배우기 어려운 난해한 글자로만 여기는 것은 한자에 어느 정도 친숙한 어른들의 편견일 수 있다. 어린이들은 각종의 시청각적 효과를 거둘 수 있는 학습 자료들을 활용하기 때문에 의외로 쉽고 재미있게 한자를 익힐 수 있는 것이다. 한자는 한글의 뿌리이자 또 하나의 우리글이다. 결코 중국인의 전유물이 아니며 아시아인 공동의 문화유산이고 우리 한글의 활용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훌륭한 보조언어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초등학교에서 필수 한자를 200·300개 익힘으로써 한자에 친숙해진 후에 중?고등학교의 한문교과를 접하게 되면 한문과목을 이수하기가 훨씬 수월할 것이다. 기초 한자를 전혀 익히지 않은 채 중등학교에서 갑자기 한문과목을 만나게 되니 대부분의 학생들이 지레 겁을 먹고 한문선택에 고개를 내두르며 혹 선택을 하더라도 곧 싫증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선택하는 학생들이 극히 적거나 없어서 한문과목은 교육과정 편제상 기재되어 있을 뿐 대부분의 학교가 선택을 회피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한자는 수 천 년을 두고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해 온 문화보존 도구이며 사회생활의 표현 수단이었다. 민족문화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자랑스럽고 오랜 우리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도 자라나는 세대에게 얼마간의 한자교육을 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뜻글자는 소리글자가 해내기 어려운 기능을 발휘하여 나름대로 문화발전과 보존에 훌륭한 보조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역경(易經) 독법의 새로운 기원을 밝혀낸 김상섭 교수는 최근의 저서 서문에서 한자는 이 세상의 많은 문자 가운데 가장 철학하기 좋은 문자라고 썼다. 국가의 원대한 문화발전을 기획하는 과정에서 꼭 참고해야 할 언급이 아닐까 생각한다.

서두에서 제기한 일련의 해프닝들은 결코 별것 아닌 가벼운 웃음거리로 간과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저간에 깔려있는 우리의 일상 언어생활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심각하게 들여다보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한글전용정책이 한글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유일한 정책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으면 좋겠다.

교육개혁에 관한 철학적 단상

묵가(墨家)사상을 신봉하는 이지(夷之)라는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하였다. ‘왜 이웃집의 노인보다 내 부모를 더 소중히 여겨야 하는 것일까? 나와 남을 구별하지 말고 모든 노인을 똑같이 공경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어린이도 나의 자식 남의 자식을 구별하지 말고 똑같이 사랑해야 하는 것 아닐까? 인간존재를 모두 똑같이 균등하게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면 다툼도 미움도 없어져서 모두가 행복한 사회가 되지 않겠는가?’ 묵가사상은 검소한 삶을 높이 평가해서 사람이 죽었을 때 간소하게 장례 치르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아마도 춘추전국시대의 심한 빈부격차와 고관 및 부유 계층의 사치스러운 행태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 같다.

마침 이지의 모친이 작고하였는데 그는 자기도 모르게 어머니의 장례를 후하게 치르고 말았다.

평소에 나와 남을 구별하지 말고 모든 장례를 간소하게 치를 것을 주장했으면서도 막상 자신의 어머니는 후히 장례를 지내는 자가당착을 범한 것이다. 그는 어머니의 장례를 계기로 묵가사상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던 것 같다.

묵가의 논리를 따른다면 대부분의 가난한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기도 간소하게 장례를 치러야 했거늘 실제로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묵가의 주장이 인간적 삶의 현실과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궁금증을 풀기 위하여 맹자를 면담하고자 했지만 맹자는 선뜻 그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 맹자는 사치와 낭비 등의 부조리한 풍속을 바꾸고자 한 이지의 개혁적 사고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그가 묵자(墨者)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의 면담이 공론(空論)에 그칠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결국 이지는 제3자를 통하여 자신의 생각을 맹자에게 전달하였는데 그 요지는 모든 사람은 차별 없이 사랑을 받아야 하며 단지 그 시작이 친족 즉 부모 자식에게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식의 궁색한 변명을 하였다.

이러한 변명은 맹자가 평소에 펴던 친친이인민(親親而仁民)의 논리에 상당히 경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맹자를 만나고자 했던 그 시점에 이지의 생각은 이미 묵가에 회의를 느끼고 맹자에게 얼마간 기울어져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묵가의 생각은 언뜻 좋은 명분을 갖고 있는 듯 하지만 그것은 실현이 불가능한 추상적인 논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맹자의 논리에 따르면 내 자식이나 형의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결코 이웃집 어린 아이를 친애하는 마음과 동일한 것일 수 없다.

또한 인간이 태어남은 하나의 근본인 부모에게서 비롯되니 모든 노인을 내부모와 똑같은 선상에서 공경하는 것은 내 부모를 거리의 사람들과 동일시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인간의 사랑이란 친족을 친히 여기는 마음을 바탕으로 하여 이 마음을 미루어서 남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親親而仁民)이지 결코 친친과 인민이 동등한 것일 수 없다. 이것이 솔직한 인간의 본성이고 정리(情理)인 것이다. 이지는 결국 맹자의 논리에 굴복하였으니 아마도 묵가와 결별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새 정부 들어 어김없이 교육개혁의 목소리가 큰 음향으로 들려온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육개혁은 변함없이 내세워지는 단골 메뉴이지만 이번의 교육개혁은 좀 특별한 데가 있다.

교육은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하고 그래서 정권이 바뀌더라도 교육의 기본 방향은 크게 변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거니와 지난 정부는 국시(國是)의 대변화를 초래할 만큼 국정기반이 요동하면서 교육정책도 함께 획일에 가까운 평등화를 지향하였다.

새 정부는 이를 전체적으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 그 개혁의 폭이 클 뿐만 아니라 그 사이에서 이해관계의 상충이 심할 것이라는 예측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앞에서 장황하게 묵가와 이지의 생각을 거론한 것은 그 고대의 추상논리가 21세기의 한국사회에 아직도 널리 포진하고 있어서 그럴듯한 명분으로 미화되어 개인의 성장을 막고 미래지향적이어야 할 국가의 교육발전을 주춤하게 하는 개탄스러울 만한 현상을 지적하고자 해서이다.

오늘날 민주주의의 한 축을 담당하는 평등지향적 사고는 그 소중한 가치에도 불구하고 자칫 묵가의 오류를 범할 우려가 있다.

인간은 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옳지만 동시에 개개인의 독특한 재능을 한껏 키울 수 있도록 장려하는 다양한 기회를 제공할 필요가 절실하다. 평등을 동등화 또는 평준화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공정한 경쟁의 룰을 지키도록 요구하는 동시에 내 아이로 하여금 남다른 성공을 이루도록 도와주려는 부모들의 강렬한 욕구가 실현될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제도적으로 마련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 욕망을 누르기만 하고 강제로 룰을 지키도록 요구하면 그 욕구가 그늘진 속으로 번지면서 부조리가 확산될 가능성이 커진다. 누구든지 의지와 능력이 있으면 자기만의 독특한 자질을 키워갈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 주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평등은 자유와 더불어 수레의 양쪽 바퀴로 비유된다. 평등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요소이지만 그것이 자유와 더불어 공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측면도 있다. 그 우선순위는 평등보다는 자유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평등없는 자유는 견딜만 해도 자유 없는 평등은 아마도 지옥으로 비유하여 지나치지 않으리라.

더 이상 이지(夷之)가 가졌던 환상에 사로잡혀서 교육발전의 발목을 잡는 일이 없도록 교육개혁이 상식과 공정에 기반하여 교육본질을 충실히 살리고 국가백년대계의 근간이 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