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 반성한 네덜란드, 악랄한 약탈자에서 관용의 전도사로. /구사일생(벌세계)
'풍차와 튤립의 나라' '유럽 속의 작은 거인' 네덜란드(Netherlands)는 유럽 서부에 위치한 국가로, 대한민국 영토의 40%밖에 안되는 작은 나라에 역사도 짧지만, 한때는 무역국가로 번성하며 세계를 호령한 강소국이자 경제대국이었다. 현대에는 안락사,동성혼, 제 3의 성 합법화, 실용주의 등 유럽에서도 자유와 관용을 상징하는 개방적인 나라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친숙한 오늘날의 네덜란드가 이루어지기까지는, 제국주의, 식민지배, 전쟁과 학살 등 지우고 싶은 어두운 역사의 그늘 또한 존재했다. 10월 22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에서는 '자유의 나라 네덜란드는 왜 학살을 저질렀나'편을 통하여 오늘날의 네덜란드가 어떻게 지나간 역사적 과오를 청산하고 자유의 관용의 나라로 거듭날수 있었는지 그 과정을 조명했다. 장붕익 한국외대 네덜란드어과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네덜란드라는 국가명의 어원은 '바다보다 낮은 땅'이라는 의미에서 비롯됐다. 네덜란드는 지형적으로 국토의 약 24%가 해수면보다 낮은 곳에 위치해있다는 특성이 있다.
초기의 네덜란드인들은 바다와의 경계면에서 제방을 쌓고 물을 퍼내어 땅을 개척했다. 수도이자 최대도시인 암스테르담도 강의 이름인 암스텔(Amsterl)과 댐(Dam)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오직 집념 하나로 척박한 자연환경을 극복하고 땅을 스스로 개척해낸 네덜란드인들을 가리켜 "신은 세상을 만들었다. 그러나 네덜란드인들은 네덜란드를 만들었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네덜란드인들은 13세기 무렵으로 대서양과 북해에서 많이 잡히던 생선인 청어를 활용한 산업과 중개 무역으로 번성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하여 선박 기술이 발달하면서 해운업도 성장한 네덜란드는 '마다의 마부'로 불릴만큼 해상 무역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또한 네덜란드는 새로운 땅을 일구는 간척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하며 현재 대한민국의 충청북도만한 크기의 영토를 새롭게 개척해냈다. 제방에서 물을 바끝올 빼내는 역할을 하는 풍차와, 새로운 땅을 활용한 낙농업 등도 발전했다. 상업의 발달로 돈의 가치가 중시되면서 귀족, 상인, 농민 등 다양한 계층이 이익을 추구하는 열린 사회도 발전하게 된다.
16세기 유럽 사회를 뒤흔든 '종교 개혁'이 네덜란드에서 크게 호응을 얻은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가톨릭 구교는 농업을 중시하고 돈을 중요시하는 상업은 천시했다. 하지만 신교인 칼뱅교는 '직업은 신이 내려준 소명이기에 농업이든 상업이든 직업상의 귀천은 존재할수 없다'는 사상을 전파했다. 상업 중심 국가인 네덜란드 사람들은 가톨릭보다 칼뱅교의 교리에 더 공감할수밖에 없었다. 네덜란드 지역을 통치하던 스페인 합수브르크 왕가는 칼뱅교를 강력하게 탄압했지만, 네덜란드인들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네덜란드인들은 '네덜란드 독립전쟁(1568-1648)'을 일으켜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를 몰아내고 1581년 세계 최초의 공화국인 네덜란드 공화국을 수립한다. 1648년에 신구교간 모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베스트팔렌 조약'이 수립되면서 네덜란드는 정식으로 독립을 쟁취하는데 성공한다.
16세기 이후 유럽에 '대항해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면서 네덜란드 공화국은 바다를 통한 해외진출에 눈을 돌리게 된다. 네덜란드는 포르투갈-스페인 등 유럽 강국들에 비하여 후발주자로 출발하며 무역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East india company)'를 설립한다.
영국, 네덜란드 등 여러 유럽 국가들이 설립한 동인도 회사는, 대항해시대에 유럽 국가에 설립한 아시아 지역의 진출을 목적으로 하는 무역 회사였다. 명목상은 회사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식민지를 운영하여 자원을 수탈하고 해상패권을 경쟁하기 위하여 설립되어 독자적인 군사력과 아시아 독점 항해권, 무역 상관까지 막강한 권한을 갖춘 식민 통치 기구에 가까웠다. 이러한 동인도회사는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정책을 언급할때 빼놓을수 없는 조직으로 언급된다.
동인도회사가 미친 또 하나의 영향은 주식시장과 금융 산업의 발전이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세계 최초로 주식회사를 설립했고, 귀족과 상인만이 아니라 여성과 외국인들, 하층민들까지 주식을 구입할수 있게 했다. 상업이 발달하여 계산이 빨랐던 네덜란드인들은막대한 배당금이 걸린 주식에 열광했고, 돈벌이가 될만한 기회가 포착되면 결코 놓치지 않았다고 한다. 이로서 17세기 네덜란드는 거대한 주식 광풍에 휩싸이게 된다.
주식 사업으로 몰린 거대한 자본금은 동인도 회사가 대규모 항해에 나설수 있었던 경제적 기반으로 이어졌다. 1609년에는 암스테르담에 세계 최초로 주식 거래소에 이어 중앙 은행이 설립되며 네덜란드는 유럽 금융 산업의 중심지로 올라서게 된다. 자연스럽게 네덜란드인들에게는 철저한 실리적 이익 추구를 목표로 하는 성향이 만연하게 된다.
한편으로 아시아로 진출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해상 무역 패권을 놓고 유럽 강국들과의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동인도회사는 유럽에서 값비싼 청향, 육두구 등 '향신료' 산업 독점을 노렸다. 먼저 원산지인 인도네시아의 말루쿠 제도에서 동인도회사인 원주민들과 연합하여 원래 이 지역을 장악했던 포르투갈을 몰아낸뒤, 이후에는 원주민들까지 학살하며 각 섬을 장악했다.
당시 동인도회사는 일본까지 진출해있었는데 1621년 반다제도에서 벌어진 대규모 원주민 학살 사건에서는 일본의 용병들을 고용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이 당시의 일본은 전국시대와 임진왜란이 끝난지 얼마되지않아 전투력이 뛰어난 용병들(사무라이)이 많았다. 이들을 고용한 네덜란드 상관의 편지에 따르면 '일본인은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낮은 급료에 소금 절인 생선 반찬 정도로 부릴수 있다'고 묘사하고 있다.
잔인한 일본 용병들에 의하여 1만 4천여명에 이르던 원주민의 93%가 학살당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겨우 480여명에 불과했다. 끝까지 저항하는 원주민은 시신을 4등분으로 회손하고 머리를 잘라 막대에 끼워 전시하며 공포감을 유발했다고 한다. '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만행은 여기에서 그치지않는다. 동인도회사는 1636년에는 대만을 침공하여 주민들을 동굴로 몰아낸뒤 봉쇄후 8일동안 독가스를 넣어 학살했고, 시신의 일부는 전리품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말루쿠 제도를 놓고 경쟁하던 영국의 무역상인들을 강제로 구금하여 고문하고 처형하기도 했다. 이는 향신료 독점을 위하여 온갖 무자비하고 반인륜적인 만행도 서슴치않은 동인도회사의 실체를 잘 보여주는 증거들로 남아있다.
결국 네덜란드는 1663년 말루쿠 제도의 종주권을 인정받으며, 약탈과 학살의 댓가로 향신료 독점에 성공한다. 17세기 동인도 회사의 향신료 교역 규모는 1억길더(현 한화 2조 1천억)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였다. 말루쿠 제도 장악 이후 번성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1730년 사상 최대 수입을 달성했고, 아시아를 넘어 전세계를 잇는 무역 네트워크를 구축하기에 이른다.
이로서 네덜란드는 자타공인 유럽을 대표하는 해상강국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당시 네덜란드 무역거래의 총액은 세계 무역의 절반에 이르렀다고 한다. 사실상 '국가밖의 국가'로 자리매김한 전성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시가총액은 현재 기준으로 한화 1경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는현재 공식적으로 세계 시가총액 1위 기업인 애플(4397조 7770억원)을 훨씬 뛰어넘는 놀라운 규모다.
네덜란드 역사에서는 이 시기를 가리켜 '황금 시대'로 불리운다. 신흥부자들이 넘쳐나던 네덜란드에서는 도시에 큰집을 짓고 시골에 별장을 지으며 사치를 누리는게 유행처럼 번졌다. 유럽인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부를 즐기는 네덜란드인들을 가리켜 "네덜란드에서 세계 최대의 부를 목격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황금시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네덜란드의 해상패권 장악을 견제하는 영국의 등장으로 영란전쟁(英蘭戰爭)이 발발하게 된다. 1652년부터 1674년까지 22년간 세 차례 벌어진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네덜란드가 패배하여 국가의 위신이 추락하고 국력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어 약 백여년뒤에는 네덜란드가 미국의 독립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영국이 제 4차 영란전쟁(1780-1784)을 일으키며 또다시 크게 패전한 네덜란드는 사실상 영국에게 해상강국의 자리를 완전히 내주게 된다. 또한 이 패배의 여파로 무역상권을 상실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1799년 파산하며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다.
네덜란드는 실추된 국력과 경제적 손실을 만회하기 위하여 해외 식민지에 대한 노골적인 수탈을 강화했다. 1830년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에 '강제 경작제도'를 시행하며 식민지 경작지에 커피 등, 네덜란드가 지정하는 특산물을 재배한후 상납하게 했다.
인도네시아 자바섬 등에서 생산한 커피는 19세기 한때 네덜란드 수출량의 전체 18%를 차지할만큼 번성했다고 한다. 인도네시아에서 벌어들인 각종 수익은 네덜란드 국가 수입의 약 30%에 이르렀다. 반면 네덜란드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하여 쌀 생산지가 감소한 인도네시아는 식량 부족으로 많은 주민들이 굶주림에 시달려야했다.
인도네시아 발리에서는 네덜란드의 압제에 저항하여 독립운동이 벌어졌다. 1906년 신식무기로 무장한 네덜란드군은 저항하는 발리 국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며 왕궁으로 전진했다. 발리의 왕족과 주민들은 저항의 의미로 집단자결을 선택하기도 했다. 네덜란드군은 이미 죽어가던 사람들에게 확인사살까지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인도네시아는 이 사건을 푸푸탄(Puputan, 죽음을 위한 투쟁)이라고 칭하며 네덜란드의 간섭과 식민지화에 저항한 대표적인 투쟁으로 기억하고 있다.
2차세계대전 기간에 일본의 침략으로 네덜란드는 잠시 인도네시아를 상실했지만, 전쟁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난 후에는 다시 돌아와 지배권을 행사했다. 네덜란드는 독립을 갈망하는 운동가와 민간인을 학살했지만, 인도네시아인들의 저항은 멈추지않았다. 국제사회에서도 미국과 유엔을 중심으로 인권과 식민지 해방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며 압박을 이기지못한 네덜란드는 결국 1949년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승인하게 된다.
인도네시아 독립 이후 국제질서의 변화에 따라 식민지들이 하나둘씩 독립되면서 네덜란드에도 큰 변화가 찾아온다. 식민지를 상실하고 한동안 침체기를 보냈던 네덜란드 경제는 건국 초창기의 상인 정신과 실리주의를 복원하며 종교, 문화, 이념보다 경제적 이익과 교역 활성화를 중시하는 풍토가 자리잡게 된다.
오늘날의 네덜란드는 과거의 영광과 과오를 모두 거울삼아 '자유와 관용'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정책이 유난히 많다. 안락사와 동성혼, 제 3의 성 인정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대마초 합법화는 여전한 찬반양론에도 불구하고 불법판매 감소및 안정성 확인에 큰 효과가 있다는 것이 드러나며 '네덜란드식 극단적 실리주의' 를 대표하는 정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네덜란드는 과거의 과오를 반성하는데도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2022년에는 네덜란드 총리가 정부를 대표하여 유럽국가중 최초로 과거의 노예무역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이어 2023년 7월 1일에는 빌럼 알렉산더르 네덜란드 국왕이 공식 행사에 사상 최초로 직접 식민지 탄압을 언급하며 "온 마음과 영혼을 다하여 과거사에 진심으로 사죄드린다'는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국왕의 진정성있는 사과에 많은 이들이 공감하며 박수를 보냈다. 제국주의적 학살과 피해 보상 등 지나간 역사적 과오에 대한 네덜란드의 끝없는 반성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현재가 과거와 다를길 원한다면 과거를 공부하라'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의 어록이다. 오늘날의 네덜란드인들이 지나간 역사의 빛과 그림자를 교훈삼아 새로운 미래가 나아가고 있는 원동력을 엿볼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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