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오 /정보상자(벌거벗은 세계사)
목차
마카오의 역사적 배경과 포르투갈의 진출
마카오의 성장과 국제 무역항으로의 발전
도박의 도시로의 전환과 경제 재편
스탠리 호와 현대 마카오의 변혁
벌거벗은 세계사 180회에서는 마카오가 어떻게 세계 최대의 카지노 도시로 변모하게 되었는지를 다루었습니다. 처음에는 포르투갈의 작은 어촌에 불과했던 마카오는 16세기 중반부터 서서히 국제 무역의 중심지로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방송에서는 마카오의 역사 속에서 펼쳐진 흥미진진한 사건들과 함께, 도박이 어떻게 마카오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생생히 전달했습니다. 어제 화요일 방영된 이 회차에서는 마카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그 사이의 변화들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에피소드에서 느낀 긴박한 감정과 흥미로운 정보들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마카오의 역사적 배경과 포르투갈의 진출
마카오는 그 역사적 배경에서 시작됩니다. 과거에는 중국 남부의 권역에서 소외된 작은 섬에 불과했으며, 인구도 미미하고 외부의 영향을 잘 받지 않는 지역이었습니다.
당시 마카오는 바다와 멀리 떨어진 작은 어촌 도시였으며, 주변 해안 지역은 명나라 시기 끊임없는 해적의 위협으로 인해 더욱 버려진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16세기 중반, 포르투갈의 도래가 마카오의 운명을 바꾸게 됩니다.
포르투갈은 당시 세계를 향한 대항해시대를 맞아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고 아시아 대륙에 가까이 접촉하였는데, 이들은 결국 마카오를 거점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포르투갈은 1553년 마카오에 도달하여, 명나라 관리와의 협상을 통해 이곳을 임대하게 됩니다.
명나라 가정제의 면전에서 상인들은 마카오를 활용하는 대신 매년 500냥의 은을 지불하기로 하였으며, 이 거래는 마카오의 향후 발전에 기틀이 되었습니다. 이때의 마카오는 그 지리적 위치로 인해 동서양 무역의 중심지로 발전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마카오라는 이름은 이 지방에서 숭배되는 어부의 여신인 마조신의 이름이 포르투갈어로 발음되면서 붙여진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마카오가 국제 무역의 거점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로 작용하였습니다.
연도 사건
1553 포르투갈 상인, 마카오 도착
1555 명나라와의 협상 결렬 후 임대 계약 체결
이런 배경 속에서 마카오는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1563년에는 인구가 약 5천명에 달하게 되는 등, 포르투갈인의 유입이 활발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EU와 아시아 간의 물자 교환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마카오는 상업과 문화가 융합된 독특한 도시로 발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는 마카오가 소규모 어촌에서 세계적인 경제 중심지로 나아가는 첫걸음이었습니다.
마카오의 성장과 국제 무역항으로의 발전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입장에서 동서양 간의 무역 교량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습니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마카오를 이용하여 명나라의 물건을 구매하여 유럽에 팔고, 그 대가로 은을 받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유럽의 은이 명나라로 유입되면서, 마카오는 경제적으로 더욱 번영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1555년 이후 인구가 급증하면서 이 지역은 경제적 부흥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마카오는 명나라와 일본 간의 무역에서도 중요한 중계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명나라의 대중국 무역량이 급증하였고, 이는 마카오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마카오에서 시작된 무역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확대되었고, 마카오는 국제 무역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마카오는 단순한 어촌에서 벗어나 뛰어난 상업 도시로의 변모를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위기는 찾아왔습니다. 네덜란드와 청나라의 출현은 포르투갈의 입지를 위태롭게 했고, 마카오가 다른 개항 도시와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 도래했습니다.
청나라의 강희제가 새로운 무역 항구를 개방하면서 마카오의 거래는 불리한 위치로 전환되었습니다. 이때 청나라의 공식 무역항인 광저우가 설립되면서, 마카오는 상업적으로 큰 타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포르투갈은 아편 밀무역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든 마카오의 경제를 유지하려 했으나, 이는 후에 또 다른 문제를 초래하게 됩니다.
도박의 도시로의 전환과 경제 재편
포르투갈이 마카오를 소유한 상황에서 도시의 경제는 도박 산업으로 재편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포르투갈 본국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마카오도 예외는 아니었기에 정부는 이해관계 속에서 도박을 합법화하게 됩니다.
1849년, 마카오 총독 호세 페가도는 도박장을 공식적으로 개장할 수 있는 법령을 발표했습니다. 이는 도박 산업의 부흥으로 이어져 경제 구조를 크게 변화시켰습니다.
대략 1860년에는 200개 이상의 도박장이 개설되며, 마카오는 도박의 도시로 급속도로 성장해 나갔습니다. 정부의 도박세가 총 재정 수입의 60%를 차지하는 등, 도박은 마카오 경제의 주요 축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도박 외에도 아편 밀매와 같은 범죄가 발호하게 되며, 마카오는 환락과 범죄가 뒤섞인 복합적인 도시가 되어갔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마카오는 중립지대로 기능하면서 많은 난민들이 이주하게 되었고, 인구는 급격히 증가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인구 증가는 마카오의 경제 성장에 기여했으나, 동시에 범죄와 불법 활동의 증가를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중일전쟁이 격화됨에 따라 마카오는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위치가 되었지만, 이러한 경제 성장과 함께 삼합회와 같은 범죄조직의 영향력도 커지게 되었고, 마카오는 도박과 범죄가 얽혀 있는 복잡한 도시로서의 정체성을 더욱 확고히 하게 되었습니다.
스탠리 호와 현대 마카오의 변혁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마카오는 현저한 변화를 겪게 되는데, 이는 바로 스탠리 호라는 인물의 등장이었습니다. 스탠리 호는 마카오에서 카지노 산업을 발전시킨 주역으로, 그는 1961년 마카오 정부로부터 40년간 카지노 독점 운영권을 취득했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마카오 최초의 고급 카지노 리조트를 개장하였고, 이는 마카오를 세계 최대의 카지노 중심지로 이끌었습니다.
스탠리 호는 그의 카지노 운영 방식을 통해 아시아의 부유한 고객들을 유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는 VIP 고객을 위해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며 카지노의 매력을 극대화했습니다. 이와 같은 인기 있는 카지노들은 이후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의 고객층을 끌어들여 마카오가 아시아의 슈퍼리치들을 위한 명소로 자리 잡게 만듭니다.
2018년 마카오의 전체 카지노 수익은 약 65조 1,800억원에 달했으며, 그중 VIP룸 수익만으로 무려 35조 8,800억원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 속에서도 마카오는 여전히 범죄의 소굴로서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포르투갈이 마카오를 반환하기로 결정한 1974년 이후, 마카오는 치안의 공백을 겪게 되었고, 범죄 조직인 삼합회가 성행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카오는 도박과 범죄에 대한 정책을 이어갔으며, 1999년에는 마카오가 중국에 반환되면서 새로운 형태의 전환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와 더불어 마카오는 중국의 특별행정구로 재편되었으며, 정부의 치안 강화와 경제 발전 방안이 모색되었습니다. 중국 정부는 마카오의 도박 산업을 발전시키면서 동시에 범죄를 억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현재 마카오는 도박의 도시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 경제 허브로서의 입지를 다져가고 있으며, 여전히 카지노 산업 역시 중요한 경제 요소로 남아 있습니다. 향후 마카오는 더욱 발전된 모습으로 경제 라인 내에서 자리잡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자세히 알아보기
벌거벗은 세계사 180회를 통해 마카오는 단순한 카지노 도시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마카오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곳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장소이자, 다양한 문화와 경제의 중심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도박과 밀매가 얽힌 복잡한 사회 구조 속에서도, 마카오가 가진 독특한 매력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마카오는 단순히 도박으로 떠오른 것이 아니라, 역사적 배경과 세계 경제의 흐름 속에서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도시임을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마카오 /PLAN C
포르투갈은 마카오를 이용하기 시작하며 돈을 벌다- 지금도 마카오에는 포르투갈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마카오는 홍콩 면적의 40분의 1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작다. 마카오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어촌의 작은 섬이었지만, 1553년, 전 세계 해역을 장악하고 해상무역을 독점하는 포르투갈이 유럽 최초로 아시아 진출 항로를 개척하고 마카오에 도착하게 되었다. 당시 명나라는 가정제 통치 시기라 내실을 다지지 못하고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심각했다. 포르투갈은 관리에게 뇌물을 주며 교역의 문을 열었고 마카오를 사용한 댓가로 매년 500냥의 은을 약속했다.
명나라 황제 입장에서 마카오는 버려진 땅이나 다름 없었다. 결국 1557년, 포르투갈이 명나라 황실의 허락으로 마카오를 체류지로 활용하였다. 지명이 호경에서 마카오로 바뀐 후, 마카오는 유럽에서 일본까지 연결해주는 무역 거점이 되었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명나라의 물건을 팔아서 막대한 이윤을 남겼다. 특히 포르투갈 국왕 마누엘 1세가 당시 인기를 끌었던 명나라의 도자기에 관심이 많아 도자기방까지 만들었다. 도자기 한 점은 중산층의 주택 한 채 가격에 달했다.
중국 도자기는 Porcelain 또는 China로 불렸는데 워낙 인기가 높아 China가 중국의 영어 이름이 되었다. 중국의 각종 차, 향신료, 약재 등이 유럽으로 향하면서 명나라는 은을 받았다. 전 세계 은이 명으로 몰린다는 말까지 있었다.
무역이 발전하는 것은 물론, 유럽의 탐험가들까지 찾아오면서 마카오가 작은 어촌에서 무역기지인 항구 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마카오의 인구는 1555년 400명에서 1563년에 5천 명으로 상승할 정도였다(5천 명의 20%는 포르투갈인).
마카오에는 포르투갈식 도로포장 기법이 남아있는데, 촘촘한 타일로 물결무늬를 이루는 모양은 바다에서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자는 의미가 담겨 있다. 마카오의 건물이 동서양의 조화를 이루면서, 건물 25개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마카오는 포르투갈어와 중국어를 공식 언어로 사용한다.
청 강희제의 해상 무역 활성화 및 마카오의 쇠퇴- 포르투갈의 기세 또한 약화되면서 영광을 잃다 광저우의 발전으로 쇠퇴하는 마카오
1644년, 명 왕조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포르투갈은 마찬가지로 임대료와 뇌물을 바치며 마카오에서 정착을 유지하였다. 그런데 1684년, 청나라를 최고의 번영기로 이끌었던 청나라 제 4대 황제 강희제가 즉위하면서 해상 무역을 활발히 하기 위해 마카오 외 다른 항구를 개방한다. 특히 청 정부는 마카오와 근접한 광저우항에 공식 무역항을 개발하고, 광저우항에 무역을 위한 체계적인 시설을 마련했다.
질 좋은 무역품들이 마카오가 아닌 광저우로 향하면서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등 유럽의 무역선들은 광저우로 몰려들었다. 게다가 1800년대에는 대항해 시대를 주도했던 포르투갈의 기세가 약화되면서 마카오의 쇠퇴기가 찾아왔다.
아편무역 이후 포르투갈이 사실상 마카오를 차지하다
그런데 포르투갈은 마카오를 잡아야만 하는 이유로 아편도 있었다. 포르투갈에 이어 영국까지 아편 무역을 하면서 40년간 중국에서 은 3조원이 흘러나갈 정도였다. 1839년, 제 1차 아편전쟁으로 1842년에 청나라가 영국에 굴복하며 난징조약을 체결했다(홍콩섬 할양 등). 포르투갈은 자신들도 마카오를 차지하려고 했다.
포르투갈은 식민지에 보내던 총독을 마카오에도 파견하고 법령을 변경하며 세금까지 징수했다. 포르투갈은 법뿐만 아니라 토지권, 행정권 등의 주권까지 빼앗았다.
마카오가 도박의 성지가 된 과정 1) 도박 합법화
- 도박, 매춘, 아편, 노예 무역까지 판치는 도시가 되어버리다
1849년, 마카오에서의 도박 합법화
포르투갈은 당시 청나라에서 금지하였던 도박을 합법화해버렸다. 1849년, 포르투갈에서 온 마카오의 총독 호세 페가도는 마카오에서 카지노 개장을 허가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청나라 시대에는 도박을 하다가 걸리면 곤장 80대를 내렸다. 명나라 초대 황제 홍무제는 도박을 금지하기 위해 도박을 한 자의 손목을 잘라버리도록(형벌 - 해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중국은 예로부터 귀뚜라미에 싸움을 붙여 이기는 쪽에 돈을 거는 게임을 즐겨하는 등 도박을 즐겨했다.
귀뚜라미 싸움은 중국의 전통 도박이라 할 수 있었다(현재도 즐기는 사람 많아서 비싸면 한 마리에 3천만원까지 경매). 마카오의 도박 합법화는 청나라 사람들에게 큰 환영을 받아 1860년에는 마카오에 200개가 넘는 도박장이 번성하였다. 포르투갈이 굳이 도박을 합법화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같은 시기 유럽에서 카지노 합법화가 유행이었다. 1806년, 나폴레옹에 의해 카지노 합법화가 이루어졌고 1826년에는 베니스에도 합법적인 카지노장이 문을 열었다. 유럽 왕국에서는 카지노장에서 나오는 세금으로 재원을 충당했다.
아편의 합법화 및 매춘업의 성행
1887년, 포르투갈은 청과 우호통상조약을 맺어 자신들의 법적인 식민지로 만들어버렸다. 마카오는 더욱 자유분방한 도시가 되었고, 아편이 유행하면서 아편 거래가 급증하게 되었다. 마카오는 아편 밀수의 기지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이제 아편이 완전히 합법화된 것이다. 마카오의 유명한 아편상 가오커닝은 도박장을 운영하다가 아편이 유행할 것을 알아차리고 1914년에 마카오에서 아편 사업권을 독점, 1937년에는 카지노 사업권까지 독점했다. 포르투갈은 도박 산업을 통제하고 세금을 효과적으로 걷으려고 카지노 사업의 독점권을 허용했다.
마카오에서는 매춘업까지 유행하였다. 19세기 마카오에서는 선상 매춘이 유행하여 이 배를 플라워보트라 불렀는데, 외관을 등불로 밝히고 꽃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다고 한다. 어린 소녀들을 납치하여 매춘업으로 넘기는 일까지 자주 일어났다.
노예 무역
포르투갈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중국인 노예 사업까지 하였다.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가 살기 어려워지자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외국으로 이주하였다(=쿨리). 포르투갈 인들은 각종 방법으로 사람을 유인하여 데려왔고, 사람들을 감옥에 가둬놓고 구타와 학대를 일삼았다. 마카오 거리에서는 배에 타기도 전에 죽은 사람들의 시신이 즐비하였다. 해외로 간 중국인들(쿨리)는 차이나타운을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마카오는 발전을 거듭하다 범죄 및 환락의 도시로 추락했다.
마카오가 도박의 성지가 된 과정 2) 스탠리 호의 등장
- 카지노의 황제가 등장하면서 급속도로 발전하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은 1938년에 광저우를 점령하고 여러 해안 도시들을 장악하였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지만 마카오는 포르투갈이 중립국을 선언하면서 전쟁의 여파를 피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마카오가 안전하다는 인식 때문에 인구가 2년 사이에 8만 명이나 급증했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설립으로 오히려 포르투갈의 지배가 더 강해지게 되었다. 중국은 내실을 다지는데 집중하느라 서방과의 충돌을 꺼렸다. 그런데 1960년대가 되자, 마카오 카지노의 대부 스탠리 호가 등장했다.
1921년, 스탠리 호는 홍콩의 명망 높은 가문에서 태어났다. 증조할아버지는 네덜란드계 유대인 영국인이며, 할아버지는 청나라 말기 5대 거상에 속할 정도로 막대한 부를 쌓았다. 그러나 스탠리 호가 13살일 때, 아버지의 주식 투자 실패로 거리에 나앉게 되었다. 스탠리 호는 중일전쟁 당시 홍콩을 떠나 마카오로 피난을 떠났는데, 마카오의 한 무역 회사에 취직을 하여 탁월한 능력으로 단 2년 만에 공동 경영자 자리까지 초고속 승진하였다. 스탠리 호는 건설 회사를 차려 엄청난 수익을 올려 100억대 자산가가 되었다. 가오커닝의 투자로 세워진 기업에게는 카지노 사업의 독점권을 주었는데, 1961년 독점권이 만료되자 스탠리 호가 입찰에 뛰어들어 마카오 관광오락공사 STDM이 60억원을 제시하면서 낙찰이 되었다. 스탠리 호의 회사는 무려 40년 동안 마카오의 카지노 사업을 독단으로 운영할 수 있었다.
그가 마카오 사업권을 따낸 이유는 번 돈의 90%를 기부와 후원으로 쓰기로 했기 때문이다. 스탠리 호가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현대식 카지노 리조트 사업이었다. 1950년까지만 해도 마카오에는 4층 이상의 호텔이 없을 정도로 허름했다. 스탠리 호는 1962년, 최신식 에스토릴 호텔을 오픈하고 1970년에는 호텔 리스보아를 차례로 개장했다. 특히 리스보아 호텔은 657개의 객실이 있는 화려한 호텔로 카지노의 화려함을 더해주었다. 리스보아 호텔은 풍수를 적용하여 마치 새장과 같은 모양, 그리고 그물을 형성화했다고 한다.
마카오 택시 또한 일반적인 빨간 색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돈을 쓰라는 의미로 상부는 노란 삼베옷, 하부를 검정 상복과 같은 색깔을 쓴다고 한다. 스탠리 호는 기존의 게임은 종류가 너무 한정적이라고 생각했다. 바카라, 다이사이, 판탄이 전부였기 때문에 유럽의 인기 게임 룰, 블랙잿 등을 마카오에 처음으로 들여오고 전문적인 딜러들을 고용했다.
때마침 1970년대에는 대만과 홍콩, 싱가포르에서 고도의 경제 성장이 시작되고 중국이 개혁 개방에 나서면서 슈퍼 리치들이 마카오로 몰려들였다. 스탠리 호는 최초로 카지노 VIP 룸 임대 제도를 만들어 브로커에게 1년에 70~150억 원의 보증금을 받고 카지노 VIP룸을 임대해주도록 했다. 브로커가 손님들을 끌어들이며 방에 묵으면 수익과 손실은 브로커, 카지노가 5:5로 배분하는 방식이었다. VIP 고객들을 위한 리무진, 숙식, 왕복 비행기 티켓까지 제공하였다. 스탠리 호는 더 많은 고객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홍콩에서 마카오로 오는 페리까지 도입하였다(기존 4시간에서 1시간으로 이동시간 감축). 스탠리 호는 마카오의 발전에 엄청난 역할을 했다. 스탠리 호는 호텔, 백화점, 은행, 부동산, 택시 등 모든 것들을 독점하면서 엄청난 재산을 벌어들였다(2018년 은퇴 당시 공식 재산 8조원).
포르투갈의 마카오 반환으로 삼합회가 몰려들다
- 포르투갈군이 철수하면서 치안 공백이 생겼다
1974년 포르투갈의 카네이션 혁명
그런데 1974년, 포르투갈을 뒤흔든 카네이션 혁명이 일어났다. 포르투갈에서는 40여 년간 독재가 지속되었고, 독재 정권에 맞춰 청년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시민들이 지지의 의미로 카네이션을 건네자, 장교들은 비폭력 쿠데타를 위해 총구에 카네이션을 꽂았다. 카네이션 혁명으로 포르투갈 카에타누 총리는 투항하였고, 새로운 정부는 포르투갈의 식민지 권리를 일괄 포기한 뒤 마카오 독립을 인정했다.
포르투갈군 철수로 인한 마카오의 치안 공백
포르투갈이 중국으로 마카오를 반환하기로 했지만 중국은 홍콩 반환이 급하여 마카오 반환은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하지만 포르투갈과의 회담을 통해 마카오를 중국 영토로 규정하였고, 반환이 언젠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협의하였다. 마카오에 주둔한 포르투갈군이 철수하였고, 포르투갈의 영향력은 점차 약해졌다. 마카오는 이제 치안 공백이 생겼고, 세계 3대 범죄 조직 삼합회가 마카오로 들어왔다.
구룡성채에 터를 잡고 무법지대를 만든 삼합회
- 결국 마카오까지 들어와 각종 범죄를 저지르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만들어지고 삼합회는 중국 본토의 탄압을 받은 바 있었다. 삼합회는 홍콩으로 도피하였는데, 특히 청나라와 영국 모두 개입하지 않았던 구룡성채가 무법지대로 변모하자 1950~1970년대에 구룡성채를 장악하였다. 구룡성채는 청나라의 땅이었지만 연고가 없어 중국 정부에서도 내버려 두었고, 공백의 땅이기에 어떤 건축법에도 해당되지 않아 난민들이 불법으로 건물을 지어 엄청난 인구가 몰렸다.
1974년, 영국인 경찰 간부의 횡령 사건을 계기로 홍콩에 반부패 수사 기관이 생겨났다. 삼합회의 뒤를 봐주던 경찰들이 대대적으로 잡히면서 홍콩 삼합회가 와해되었고, 일부는 마카오로 이동했다(카지노 번성의 기회를 노림). 특히 1970년대 마카오의 최대 파벌 14K파 보스까지 올라섰던 완콕코이는 마약, 무기 밀매, 매춘 등 조직이 몸담은 사업에 개입하였다. 고리대금업, 장기 밀매는 물론 카지노 사업을 둘러싼 피 튀기는 전쟁도 시작되었다.
1997년, 14K파에 의해 우온록 파의 보스가 살해당하고 보름 뒤 리스보아 호텔 앞에서 총격전이 벌어져 14K파 조직원 3명이 죽었다. 결국 14K 일원이 유죄 판결을 받자, 판사를 보복성으로 살해하는 등 문제가 커지자, 마카오 경찰이 범죄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1998년에 조직 범죄로 기승을 부리면서 1980~1990년대 홍콩 느와르 영화가 성행했다.
1999년 마카오의 주권을 되찾고 삼합회를 와해시키다
- 라스베이가스와 손을 잡고 마카오를 더욱 발전시켰다
1997년, 중국이 홍콩의 주권을 영국으로부터 반환받는데 이어 1999년 12월 20일, 마카오의 주권까지 되찾게 되었다. 마카오를 돌려받은 중국 당국은 삼합회를 와해시켰지만, 반환 후 50년간은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한다는 조건이 있어 도박 합법화는 계속되었다. 이에 마카오는 중국에서 유일하게 도박이 합법화된 곳이 되었다. 2001년, 중국은 40년간 이어진 스탠리 호의 카지노 독점 체제를 깨뜨려 통제권을 장악하고 라스베이거스와 손을 잡아 마카오를 더 발전시켰다.
2007년에는 7조원을 투입하여 베네시안 마카오를 만들고, 파리지앵 호텔, 더 런더너 호텔 등을 계속해서 지으면서 코타이 스트립이 형성되었다. 관객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한 화려한 쇼까지 만들어졌고, 완벽한 관광 도시가 되었다. 2006년, 마카오는 라스베이거스 매출을 추월하고 2013년에는 7배의 차이가 났다.
카지노와 관광 매출이 매출의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도박 중독으로 인한 자살율이 높고, VIP 룸은 범죄의 온상이 되고 있다. 마카오에는 수많은 전당포가 늘어서 있다. 도박으로 인한 문제가 심각하다 보니 MICE 산업(Meeting / Incentives, Convention, Events&Exhibition)을 밀고 있다. 또한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긴 다리인 강주아오 다리를 만들어 마카오 - 홍콩 - 주하이시를 잇는 다리를 건설하기도 하였다.
(마찬가지로 도박의 도시인 라스베이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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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카오는 어떻게 세계 최대 카지노 도시가 되었나?
- 1553년, 포르투갈이 유럽 최초로 아시아 진출 항로를 개척하고 마카오에 도착했다. 가정제 통치 시기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심각하여 포르투갈이 뇌물을 주며 교역의 문을 열었고, 1557년에는 아예 명나라 황제의 허락을 받고 유럽 - 일본을 잇는 무역 거점으로 활용하였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도자기 등 무역을 통해 막대한 돈을 벌었다. 1684년, 청나라 제 4대 황제 강희제가 즉위하면서 광저우 등 다른 항구를 개방하고, 마카오는 경쟁 + 포르투갈의 기세 약화 때문에 점차 쇠퇴하였다. 하지만 1839년, 제 1차 아편전쟁으로 청나라가 난징조약을 체결하고 홍콩을 영국에 할양하자, 포르투갈은 자신들도 마카오를 차지하고자 총독을 파견하고 세금을 징수하며, 법령까지 변경하였다.
- 1849년, 마카오에서 카지노 개장을 허가하였고 1887년, 포르투갈이 공식적으로 마카오를 공식적인 식민지로 만들어버렸다. 가오커닝은 1914년에 아편 사업권을 독점하고 1937년에는 카지노 사업권까지 독점하는 등 막강한 기세를 떨쳤다. 19세기에는 매춘업이 성행하였고, 중국인들이 해외로 나가면서 노예 무역이 성행했다(=쿨리).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포르투갈은 중립국이었기 때문에 마카오가 안전하다는 인식이 퍼져 인구가 늘어났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이후에도 서양과의 충돌을 피하면서 오히려 포르투갈의 지배가 더욱 강해졌다. 한편, 자수성가한 스탠리 호는 1961년 카지노 사업의 독점권 입찰에 성공하여 무려 40년 동안 마카오의 카지노 사업을 독단적으로 운영했다. 스탠리 호는 1970년 리스보아 호텔로 대표되는 현대식 카지노 리조트 사업은 물론 기존 게임의 다양화, 전문 딜러 고용으로 마카오의 도박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1970년대 중국의 개혁 개방으로 슈퍼 리치들이 몰려오자 VIP룸 대여, 홍콩에서 마카오로 1시간이면 오는 페리를 만드는 등 사업을 번창시키고, 호텔, 백화점 등 모든 것을 독점하면서 엄청난 재산을 모았다. 1974년, 포르투갈의 카네이션 혁명이 일어난 뒤 포르투갈은 마카오 독립을 인정했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홍콩에 집중하느라 반환을 미뤘고, 포르투갈군이 철수하면서 삼합회가 홍콩에서 마카오로 몰려왔다. 1997년, 중국이 홍콩의 주권을 받환받는데 이어 1999년에는 마카오의 주권을 되찾았고, 삼합회를 와해시켜버렸다. 하지만 50년간은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어 도박 합법화가 계속되었고, 중국 정부는 2001년 스탠리 호의 카지노 독점 체제를 깨뜨리고 라스베이거스와 손을 잡아 2007년 베네시안 마카오 등을 만들며 완벽한 관광 도시를 만들었다.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긴 다리인 강주아오 다리를 만드는 등 마카오를 더욱 발전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