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 전에 겪었던 손끝에 얽힌 사연을 회상해본다. 거의 20 여 년 전 일이다. 회사 일을 마친 일행은 오랜만에 회식을 하고 나이트클럽을 가기로 했다. 여직원이 5명이었고 남자는 3명이었다. 현란한 사이키 조명 불빛 아래에서 청춘남녀들이 열심히 춤을 추고 있었고 제법 유명한 가수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는 Y모라는 가수였다. 끈적끈적한 느낌이 드는 노래로 그 분위기에 아주 잘 녹아들고 있었다. 맥주를 시켜놓고 목만 축이고 무대로 나가 열심히 몸을 흔들어댔다. 모두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기분을 내고 있었다. 그는 대단히 잘나가는 가수였지만 제대로 호응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결국 방향전환을 시도했고 그렇게 해서 평가를 받고 있는 입장이었던 듯했다. 설 명절을 앞두고 있는 섣달 그믐이 가까워져 있는 상황이어서 사회분위기도 한층 고조된 상황이었다. 여자는 많고 남자가 부족한 상황이어서 부킹을 못한 남자들이 치근덕거리고 있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계속해서 블루스를 추자고 여직원들에게 집적거리고 있었다. 계속해서 남자직원이 제지를 했고 접근을 막아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심각하게 상황이 고양되어 더 이상 화를 참지 못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기분을 잡친 일행은 계산을 마치고 그곳을 빠져나오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그 불한당들은 계속해서 접근을 시도했다. 이렇게 되자 그 화를 참지 못한 남자직원 C군이 그만 주먹을 한 대 날렸다. 상대방의 불의의 기습을 당해 쓰러지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한방 먹인 주먹은 상대편의 눈가로 날려졌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 눈가가 조금 찢어지면서 상처를 입었다. 더 이상의 소란은 없었다. 주먹을 한번 먹을 날린 것이 처음이었고 마지막이었다. 그런데도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을 커져버렸고 수습하기도 힘들게 되었다. 곧이어 업소측에서 경찰에 연락을 했다. 그리고 얼마후에 경찰이 들이닥쳤고 바로 인근 파출소로 가게 되었다. 상대 피해자를 데리고 병원으로 갔다. 그 병원이란 곳도 일반 병원이 아니라 경찰과 연관된 전문병원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것은 앞으로 발생될 법적 분쟁에서 아무런 문제도 없을 만큼 철저하게 체크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치료 전 상처, 치료 후 상태 등에 대해 세밀하고 치밀하게 촬영되고 증거가 되는 과정이 진행되었다. 일반 환자 같으면 별로 비용도 크지 않을 듯 했는데 그보다는 훨씬 고가의 치료비가 나왔다. 그리고 진단서도 몇 주간으로 나왔다. 참으로 난감했다. 그렇게 치근대고 실랑이를 하던 불한당이었던 만큼 합의과정도 만만치가 않았다. 어차피 사단은 벌어진 상황이고 결과는 나와 버린 것이다. 피해자가 고분고분 합의를 해주지 않다보니 결국은 가해자는 파출소에서 경찰서로 인계가 되었다. 부모가 오고 변호사가 선임되고 사건의 처리는 쉽지 않았다. 이제 갓 입사해 일하게 된 직원이다 보니 아직까지 회사에 적응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결국 이로 인해 여러 가지 후유증이 일파만파로 번지게 되었다. 변호사와 가족의 갖은 노력으로 인해 피해자와의 합의가 이루어졌지만 그 과정은 참으로 큰 어려움이 있었다. 남자는 세끝을 조심해야한다는 속설이 있다. 그중 하나가 손끝이다. 아무리 화가나고 놀리더라도 결코 얼굴은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주먹을 날리더라도 몸통이나 신체 부분에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모든 잘못이 피해자에게 있고 원인제공을 했다 하더라도 결과에 따라서 모든 게 처리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의 것은 혀끝이다, 그것은 말을 잘못하면 폐가망신의 지름길임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의 것은 결국 거시기의 실수라고 할 수 있다. 거시기 그것은 쉽게 간과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클린턴이 아닐까. 그렇게 잘 나갔고 제대로 미국의 경제와 정치에 혁혁한 공헌을 세웠지만 그런 모든 부분이 제대로의 평가를 받지 못한 것이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을 것이다. 세계 4대철학자 내지 성현으로 추앙되는 이가 얘기한 것이 그 유명한 말이다. 그것은 ‘악법도 법이다.’ 라는 말이다. 이 말은 자신이 그것을 회피할 수도 도망할 수도 있는 명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순응하고 복종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에 반해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나오는 줄거리의 핵심은 제대로 된 실질적인 가치가 명목적인 허울은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이다. 무가치한 전당포 늙은 노파의 미래가치보다는 젊은 청춘의 무한대의 실현가능성이 보다 더 존중되고 보호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일순 그럴 수 있는 묘한 모순이다. 그렇지만 작가나 세계가 인정하는 부분은 모든 인간의 목표로 하는 가치에서 그 우열은 쉽게 결론내릴 수 없는 부분이라는 것이다. 각자가 추구하는 바 그 가치는 나름의 소중한 값어치를 갖고 있는 것이므로 그것에서 서로 비교 될 수 있는 건 분명 아닐 것이다. 좋은 변호사는 나쁜 이웃이라는 법언이 있다. 이는 제대로 된 법률가가 일반적인 생활에는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얘기이다. 우리의 정서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얘기이지만 선진국에서는 비일비재한 얘기로 전파되고 있다. 이렇게 한번 손을 잘못 놀려서 인생을 망친 얘기는 나열하자면 셀 수조차 없을 만큼 넘쳐날 것이다. 지금에야 그때 왜 그렇게 화가 많이 났고 왜 참을 수 없었을까 하는 회의가 일기는 한다. 이 문제의 초점은 그렇게 욕구불만을 해소하는 순간을 지나면 결국 파탄으로 치닫는다는데 있다. 그 사건을 떠올릴 때마다 깨닫게 되는 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더 터득해야한다는 거였다. 울컥하는 일상으로 인생을 마칠 게 아니라 성숙된 삶의 자세로 일생을 준비하는 처세가 필요한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