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면 나는
활짝 피어나기 전에 조금씩 고운 기침을 하는
꽃나무들 옆에서 덩달아 봄앓이를 하고싶다
살아있음의 향기를 온몸으로 피워올리는
꽃나무와 함께 나도 기쁨의 잔기침을 하며
조용히 깨어나고 싶다
봄이 오면 나는
매일 새소리를 듣고싶다
산에서 바다에서 정원에서
고운 목청 돋우는 새들의 지저귐으로
봄을 제일 먼저 느끼게 되는 나는
바쁘고 힘든 삶의 무게에도 짓눌리지 않고
가볍게 날아다닐 수 있는
자유의 은빛 날개 하나를
내 영혼에 달아주고 싶다
봄이 오면 나는
조금은 들뜨게 되는 마음도
너무 걱정하지 말고
더욱 기쁘고 명랑하게
노래하는 새가 되고 싶다
봄이오면 나는
유리창을 맑게 닦아 하늘과 나무와 연못이
잘 보이게 하고
또 하나의 창문을 마음에 달고 싶다
전화를 걸 때면 이해인
사랑하는 너에게
전화를 걸기 전에 나는 늘 두렵다
너의 ‘부재중’이 두렵고 자동응답기가
전해줄 정감 없는 목소리가 너 같지 않아서 두렵고
낯선 누군가
우리의 이야기를 엿들을까 두렵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왠지 전화로는
내 마음을 다 이해 못할 것 같은
너에 대한 약간의 불신이 두렵고
시간이 급히 달려와서
우리의 이별을 재촉하는 듯한
서운함이 나를 슬프게 한다.
먼 거리도 가까이 이어주는 고마운 선이
내게는 탁탁 끊기는 불협화음의
쓸쓸함으로 남아 떠나질 않고 있으니
나는 오늘도 네게 전화를 걸 수 없다.
바람의 시
바람이 부네
내 혼에 불을 놓으며 바람이 부네
영원을 약속하던
그대의 푸른 목소리도 바람으로 감겨오네
바다 안에 탄생한 내 이름을 부르며
내 목에 감기는 바람
이승의 빛과 어둠 사이를
오늘도 바람이 부네
당신을 몰랐더라면 너무 막막해서
내가 떠났을 세상 이 마음에
적막한 불을 붙이며 바람이 부네
그대가 바람이어서
나도 바람이 되는 기쁜 꿈을 꾸네
바람으로 길을 가네 바람으로
가을 편지
초록의 바다 위에
엎질러놓은
저 황홀한 불빛의
세례성사
솔숲 사이로 빛나는
한 그루 단풍나무처럼
그대는 내 앞에 계십니다
푸름 속에 혼자 붉어
가을 내내
눈길을 주게 되는
단풍나무 한 그루처럼
나도 자꾸
그대를 향해 있는
눈부신 가을 오후
여백이 있는 날
여백이 있는 날
휴식과 사색이 마련될 수 있는 날
평소에 무심이 지나쳤던
자연과 사물과 사람을
제대로 유심히 바라보며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는
여백이 있는 날
작은 기쁨
내가 죽기 전
한 톨의 소금 같은 시를 써서
누군가의 마음을 하얗게 만들 수 있을까
한 톨의 시가 세상을 다 구원하진 못해도
사나운 눈길을 순하게 만드는
작은 기도는 될 수 있겠지
힘들 때 잠시 웃음을 찾는
작은 위로는 될 수 있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여
맛 있는 소금 한 톨 찾는 중이네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은
창을 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
오래오래 홀로 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슬픈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합니다."
풀꽃처럼 작은 이 한 마디에
녹슬고 사나운 철문도 삐걱 열리고
길고 긴 장벽도 눈 녹듯 스러지고
온 대지에 따스한 봄이 옵니다.
사랑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강한 것입니다.
상사화 ( 이해인 )
아직 한 번도
당신을
직접 뵙진 못 했군요.
기다림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를
기다려 보지 못한 이들은
잘 모릅니다.
좋아 하면서도 만나지 못하고
서로 어긋나는 안타까움을
어긋나 보지 않은 이들은
잘 모릅니다.
날마다 그리움으로 짙어 진 꽃술
내 분홍빛 애틋한 사랑은
언제까지 홀로여야 할까요?
오랜 세월 침묵 속에서
나는 당신께 말하는 법을 배웠고
어둠 속에서
휘로 없이도 신뢰하는 법을
익혀 왔습니다.
죽어서라도 꼭
당신을 만나야지요
사랑은 죽음 보다 강함을
오늘은 어제 보다
더욱 믿으니까요.
그대 침묵으로 바람이 되어도
눈을 감아도
마음으로 느껴지는 사람..
그대 침묵으로 바람이 되어도..
바람이 하는 말은
가슴으로 들을 수가 있습니다..
아침 햇살로
고운 빛 영그는 풀잎의 애무로..
신음하는 숲의 향연은 비참한 절규로..
수액이 얼어 나뭇잎이 제 등을 할퀴는 것도
알아보지 못한 채..
태양이 두려워
마른 나뭇가지 붙들고 메말라 갑니다..
하루종일 노닐던 새들도
둥지로 되돌아갈 때는
안부를 궁금해 하는데..
가슴에 품고 있던 사람의 안부가
궁금하지 않은 날 있겠습니까..
삶의 숨결이 그대 목소리로 젖어 올 때면..
목덜미 여미고 지나가는 바람의 뒷모습으로도..
비를 맞으며 나 그대 사랑할 수 있음이니..
그대 침묵으로 바람이 되어도
바람이 하는 말은
가슴으로 들을 수가 있습니다
내 마음에 그려 놓은 사람
내 마음에 그려 놓은
마음이 고운
그 사람이 있어서
세상은 살맛 나고
나의 삶은
쓸쓸하지 않습니다
그리움은
누구나 안고 살지만
이룰 수 있는 그리움이 있다면
삶이 고독하지 않습니다.
하루 해 날마다 뜨고 지고
눈물 날것 같은 그리움도 있지만
나를 바라보는
맑은 눈동자 살아 빛나고
날마다 무르익어 가는 사랑이 있어
나의 삶은 의미가 있습니다.
내 마음에 그려 놓은
마음 착한 그 사람이 있어서
세상이 즐겁고
살아가는 재미가 있습니다.
작은 기쁨의 감상
봄비가 살짝 얼굴을 간지럽히는 주일. 모처럼 여유가 있어 글방 앞의 매화 세 송이를 따다 찻잔에 넣으니 향기가 진동해 놀라는 마음으로 봄 한 모금을 마셔봅니다. 간밤 꿈에는 누군가에게 발라줄 허브크림을 찾다가 잠이 깼는데 어제 갑자기 허리가 아프다고 하는 제게 친구수녀가 ‘파스라도 붙여봐’ 하는 말을 듣고 파스를 붙여서 그런 꿈을 꾸었나 봅니다. 큰 기대 없이 파스 한 장 붙였을 뿐인데도 통증이 잦아드는 걸 경험하면서, 아프다고 하는 이들의 말을 무심히 듣지 말고 무엇이라도 챙겨주는 배려심을 가져야지, 생각한 그 마음이 아마 꿈으로 나타난 모양입니다.
요즘은 일체의 외부 활동을 하지 않으니 수십 년 동안 모아둔 편지들을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가족과 친지, 청소년, 군인, 성직자, 수도자, 재소자, 장애인, 국내외를 포함한 미지의 독자별로 정리를 하다 보면 개인의 사연과 더불어 참으로 다양한 내용들이 나옵니다. 인터넷 문화가 덜 발달되어 있던 1980년대의 편지들은 유난히 긴 내용이 많습니다. 지금은 우표도 없어지고 스티커로 대체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아름다운 우표들이 많이 붙은 편지들을 보는 일은 늘 설레는 기쁨을 줍니다.
“…제게 힘이 되어준 수녀님의 글들이 헛되지 않도록 이웃들과 함께 사는 세상임을 알고 옆 사람의 발밑도 살필 줄 아는 사람이 될 것을 약속드립니다… 부디 수녀님께서 소외당하는 이의 아픔을 아시고 어두운 곳에서 찬란한 빛이 되는 삶을 사시도록 신께 기도드립니다. 모자란 자식을 한 번 더 보듬어주는 어머니가 되옵소서. 어지러운 글로나마 더듬거리며 감사의 인사 올립니다.”
연천의 어느 부대에서 이런 편지를 보낸 종찬이란 군인도 지금쯤은 중년의 가장이 되어 어디선가 살고 있겠지요. 모자란 자식을 한 번 더 보듬어주는 어머니가 되라는 그 젊은이의 당부를 앞으로도 열심히 실천해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벌써 20년이 지났습니다… 저는 어릴 때 수녀님께 편지를 썼는데 답장이 와서 고등학교까지 편지를 나누었습니다… 검정 동전 지갑에서 꼬깃꼬깃 천 원짜리를 꺼내셔서 제게 햄버거를 사 주셨는데 제가 많이 감동했습니다. 아직도 그때 수녀님의 마음과 행동은 평생 제가 살아가는 삶에 길잡이가 되었습니다.” 20년 만에 소식을 전해온 은미라는 아가씨는 지금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안산에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언젠가는 다시 만나자고 약속을 한 이 편지의 주인공 속의 제 모습을 떠올리며 빙그레 웃어봅니다. 구체적인 사랑의 행동은 사소한 것일지라도 한 사람의 삶에 깊은 영향으로 남을 수 있다는 걸 다시 기억하면서!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윤동주 시인의 ‘쉽게 쓰여진 시’의 한 구절을 자주 떠올리면서 이토록 힘든 시대에 수도자로서 할 일에 고민하며 종종 자괴감에 빠지기도 하는 요즘. 다시 읽어보는 독자들의 옛 편지가 따뜻한 위로와 용기를 줍니다. 몸과 마음이 많이 아픈 사람들을 일일이 방문하지 못하고 힘겹게 사는 이웃을 위한 현장 봉사를 따로 하진 못할지라도 지금 있는 자리에서 글로써 위로하는 사람이 되어도 괜찮은 거라고!
“사랑하는 이가 앓고 있어도/ 그 대신 아파줄 수 없고/ 그저 눈물로 바라보기만 하는 막막함/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매일 삶을 배웁니다/ 그리고 조금씩 기도하기 시작합니다”라고 시에서도 표현을 했지 않느냐고! 그러니 다시 사랑하고 기도하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것을 믿고 맛있는 언어의 소금 한 톨 꾸준히 찾으라고 저를 다독이는 이들의 보이지 않는 음성을 듣습니다. 20년 전 1월 어느 날의 일기에 메모해 둔 한 구절을 새로운 사명선언문으로 읽어보며 매화차 한 잔을 마시는 이 아침. 우울했던 마음에 살며시 희망의 꽃 한 송이 피어납니다. “…결국은 언제 어디서나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그렇게 중요하고 그렇게 힘든 것이다. 세상에 사는 동안은 사람을 사랑해야 하리라, 예수그리스도께서 항상 우선적으로 눈길을 주었던 힘없고 아프고 약한 사람들의 벗이 되어야 하리라.”
'현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광화문, 겨울, 불꽃, 나무 (0) | 2021.12.08 |
---|---|
고향 정지용 (0) | 2021.12.08 |
별을 헤는 밤 윤동주 (0) | 2021.09.06 |
밥을 지으며 최영미 (0) | 2021.09.06 |
무녀의 춤 신석초 (0) | 2021.09.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