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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밥을 지으며 최영미

by 자한형 2021.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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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물은 대강 부어요

쌀 위에 국자가 잠길락말락

물을 붓고 버튼을 눌러요

전기밥솥의 눈금은 쳐다보지도 않아요!

밥물은 대충 부어요. 되든 질든

되는대로

대강. 대충 살아왔어요

대충 사는 것도 힘들었어요.

전쟁만큼 힘들었어요

목숨을 걸고 뭘 하진 않았어요

(왜 그 래야지요?)

서른다섯이 지나

제 계산이 맞은 적은 한 번도 없답니다

등단 소감

내가 정말 시인이 되었단 말인가

아무도 읽어주지 않아도

멀쩡한 종이를 더럽혀야 하는

내가 정말 시인이 되었단 말인가

신문 월평 스크랩하며

비평가 한마디에 죽고 사는

내가 정말 썩을 시인이 되었단 말인가

아무것도 안 해도 뭔가 하는 중인

건달 면허증을 땄단 말인가

내가 정말 여, 여류시인이 되었단 말인가

술만 들면 개가 되는 인간들 앞에서

밥이 되었다, 꽃이 되었다

, 고급 거시기라도 되었단 말인가

괴물

En 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 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빡 잊고 En 선생 옆에 앉았다가

Me too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나는 소리쳤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감히 30년 선배를 들이받고 나는 도망쳤다

En이 내게 맥주잔이라도 던지면

새로 산 검정 조끼가 더러워질까 봐

코트 자락 휘날리며

마포의 음식점을 나왔는데

100권의 시집을 펴낸

'En은 수도꼭지야. 틀면 나오거든.

그런데 그 물이 똥물이지 뭐니'

(우리끼리 있을 때) 그를 씹은 소설가

박 선생도 En의 몸집이 커져 괴물이 되자

입을 다물었다.

자기들이 먹는 물이 똥물인지도 모르는

불쌍한 대중들

노털상 후보로 En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En이 노털상 받는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이 나라를 떠나야지

이런 더러운 세상에 살고 싶지 않아

괴물을 키운 뒤에 어떻게

괴물을 잡아야 하나

선운사에서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서른, 잔치는 끝났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 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모으리라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가을에는

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미칠 듯 그리워질 때가 있다

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놓은,

뭉게구름도 아니다

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

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름을 보노라면

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내 속에 들어온다

뭉게뭉게 피어나 양떼처럼 모여

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

유리창에 우연히 편집된 가을 하늘처럼

한 남자의 전부가 가슴에 뭉클 박힐 때가 있다

무작정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가을에는,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와

엉금엉금, 그가 내 곁에 앉는다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

인생

달리는 열차에 앉아 창밖을 더듬노라면

가까운 나무들은 휙휙 형체도 없이 도망가고

먼 산만 오롯이 풍경으로 잡힌다

겨울을 물리친 강둑에 아물아물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시간은 레일 위에 미끄러져

한쌍의 팽팽한 선일 뿐인데

인생길도 그런 것인가

더듬으면 달음치고

돌아서면 잡히면

흔들리는 유리창 머리 묻고 생각해본다

바퀴 소리 덜컹덜컹

총알처럼 가슴에 박히는데

그 속에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못다 한 우리의 시름이 있는

가까웠다 멀어지는 바깥세상은

졸리운 눈 속으로 얼키설키 감겨오는데

전선 위에 무심히 내려앉은

저걸,

하늘이라고 그러던가

내 속의 가을

바람이 불면 나는 가을이다

높고 푸른 하늘이 없어도

뒹구는 낙엽이 없어도

지하철 플랫폼에 앉으면

시속 100킬로로 달려드는 시멘트 바람에

낡은 초상들이 몰려왔다 흩어지는

창가에 서면 나는 가을이다

따뜻한 커피가 없어도

녹아드는 선율이 없어도

바람이 불면

5월의 풍성한 잎들 사이로 수많은 내가 보이고

거쳐온 방마다 구석구석 반짝이는 먼지도 보이고

어쩌다 네가 비치면, 가을이다

담배연기도 뻣뻣한 그리움 지우지 못해

알루미늄 새시에 잘려진 풍경 한 컷,

우수수

네가 없으면 나는 가을이다

팔짱을 끼고

-

최영미

저자 소개 : 최영미(Choi Young Mi,崔泳美)

1961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서양사학과와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를 졸업했다. 1992[창작과비평] 겨울호에 속초에서7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꿈의 페달을 밟고, 돼지들에게, 도착하지 않은 삶, 이미 뜨거운 것들, 다시 오지 않는 것들, The Party Was Over, 장편소설 흉터와 무늬, 청동정원, 산문집 시대의 우울: 최영미의 유럽일기, 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 화가의 우연한 시선, 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다, 아무도 하지 못한 말, 명시를 해설한 내가 사랑하는 시, 시를 읽는 오후가 있다. 돼지들에게로 이수문학상을 수상했다. 괴물등 창작 활동을 통해 문단 내 성폭력과 남성 중심 권력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확산시켜 성 평등에 기여한 공로로 2018년 서울시 성평등상 대상을 받았다.

1994년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일간지 16단 통광고를 내는 파격을 보이며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출간했다. 이 시집은 역시 시집으로는 이례적으로 오십 만 부 이상이 팔려가며 그 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러나 문학평론가 신수정은 "아무도 날 쳐다보지 않았다. 숨을 크게 들이쉬며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여자가 담배를 피운다고 수상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없었던 것이다."로 시작하는 시인의 산문집 시대의 우울발문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최영미의 유럽일기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시대의 우울을 통해 한 예민한 자의식이 세계와 벌이는 치열한 고투를 본다.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눈으로 진정한 자아를 찾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의 여정은 소설 주인공의 모험에 가득 찬 행로에 가깝다. 그러기에 런던파리쾰른밀라노니스베네치아 등 이방의 도시를 향한 순례 끝에 정작 그가 도달하게 되는 것은 내가 어떤 인간인지,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 없는 게 무엇인지, 얼마짜리 방이면 만족할 수 있는 인생인지,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그리워하는지에 대한 정직한 깨달음이다.

자신의 성격에 잘 맞을 것이라던 에스파냐와 한때 동경의 대상이었던 프라하에서 다만 무시무시한 광기와 참을 수 없는 합리만을 감지하는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가 아니다. 오히려 그의 맨얼굴은 독일의 편리한 문명과 파리 시민의 거칠 것 없는 자유, 니스의 화려한 햇빛과 베네치아의 개방성에 대한 매혹 속에 깃들여 있다. 근대주의자의 모험. 나는 이 시인의 여정에 이런 이름을 붙인다. 80년대에는 마르크스주의자와 화해하지 못하고 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과 손잡지 못하는 그의 당혹감은 바로 이 시대 30대의 `우울`한 초상이다. 나와 당신에게, 그리고 그에게 `잔치`는 아직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2002년 미국에서 출간된 3인 시집 Three Poets of Modern Korea2004년 미국번역문학협회상의 최종후보로 지명되었으며, 2005년 일본에서 발간된 시선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일본 문단과 독자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축구에세이 공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등 이색적인 저서도 출간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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