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언론사 연재물 등59 주요한 논설위원 주요한 - 경향 폐간 부른 ‘여적 필화’ 당사자…시인·언론인·정치인 ‘족적’/심진용주요한은 1900년 평양에서 목사인 아버지의 8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소설가 주요섭이 그의 동생이다. 주요한은 일본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와 1925년 중국 상하이(上海) 후장대를 졸업했다. 수필가 피천득도 주요한의 주선으로 같은 대학을 나왔다. 그가 1919년 발표한 ‘불놀이’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자유시로 알려져 있지만 김억의 ‘봄은 간다’(1918)나 한용운의 ‘심’(1918)이 먼저라는 견해도 있다. 주요한은 언론인이자 정치인이기도 했다. 1959년 ‘여적 필화사건’ 당시 그는 민의원이었다. 이듬해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5월 열린 민의원 선거에 출마해 재선됐고, 장면의 제2공화국 정권에 입각해 부흥부 .. 2024. 9. 24. 정지용 초대 논설주간 정지용4/ 백승찬‘붓 끝 남은 먹물’로 세상 아름다움·모순 아우른 ‘향수’의 논객경향신문 70년은 ‘여적’ 70년이다. 1946년 10월6일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2만건 이상 게재된 여적의 첫 회 집필자는 경향신문 초대 논설주간 정지용 시인(1902~1950?)이었다.1930년대 휘문고보 교사 시절의 정지용. 경향신문 자료사진“여적이 뛰어난 장인의 화룡점정이라면 이만한 생색이 다시 없겠지만, 잔 받침에 흘러내린 술방울이라면 부질없는 일이요, 하다못해 펑펑 흘린 수만 섬의 눈물이 거쳐간 뒤에, 뼈에 맺힌 설움에 절어 나온 짜내는 눈물방울이라면 쓸모도 있겠고, 생각대로 곧바로 행동하며 강직하게 거리끼지 않고 직언을 하여 입가에 침을 튀겨가며 곧은 말을 하는 침방울 같을진대, 이 또한 때로는 청량.. 2024. 9. 24. 염상섭 좌·우 이념 넘어 ‘균형 있는 언론’ 틀 잡은 경향의 첫 얼굴/한윤정 초대 편집국장 염상섭1946년 10월6일 경향신문 창간은 당대를 주름잡던 문인들이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편집국장 염상섭, 주필 정지용, 문화부장 김동리, 문화부 기자 박영준 등이 가톨릭 신부인 양기섭 사장과의 협의 아래 신문을 만들었다. 초대 편집국장 염상섭(1897~1963)은 1947년 가을까지 재직하며 해방 직후 극심한 좌우대립의 와중에서 경향신문의 공명정대한 입장을 정리하는 데 기여했다. 이는 창간 당시 50세였던 그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두루 경험한 원숙한 소설가이자 언론인이었기에 가능했다.경향신문 초대 편집국장을 지낸 직후인 1948년 서울 돈암동 집 앞에 서 있는 염상섭 작가.당시 서울은 혼란의 도가니였다. 좌.. 2024. 9. 24. 최일남 나의 소공동 시절 /최일남 작가문화면, 구색용서 탈피 ‘변화의 바람’…지면 경쟁에 발품 더 팔아70년 생일잔치에, 과객 축에도 들지 못할 나를 ‘경향 사람들’에 끼워줘 고맙다. 경향신문에는 1962년 봄에 들어갔다가 1963년 봄에 나왔다. 송건호 선생 주선으로 서울 소공동 사옥에서 딱 1년을 보냈는데 입사 당시의 직함은 문화부 차장이었다. 타사(민국일보)의 문화부장을 데려오는 마당에 안 됐지만, 반년 후에는 꼭 부장 발령을 내겠다는 약속을 들은 끝이다. 민국일보 논설위원에서 경향신문 논설위원으로 나보다 먼저 자리를 옮긴 송 선생은 그걸 “조직체 일반의 자존 의식”으로 설명했다.[경향사람들] (2) 나의 소공동 시절 최일남 작가그 이전의 언론계 입문이 애초에 난데없어서도 당자인 나는 기분이 언짢거나 서운.. 2024. 9. 24. 이전 1 ··· 3 4 5 6 7 8 9 ··· 1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