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단편소설390 65. 여름의 껍질 여름의 껍질 -전상국 망 초 1 마장동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이곳 풍암 계곡 입구까지 꼭 2시간 30분이 걸렸다. 버스의 종착지인 반곡리까지는 아직 두어 마장을 남겨 놓은 지점이라고 했다. 대부분 십대들인 등산객들이 기성을 내지르며 와그르르 쏟아져 내리자 버스 속은 금세 텅 비었다. "아저씬 반곡까지 갈 거예요? " 키가 자그마한 안내원이 내 앞으로 손을 내밀며 핀잔주듯 말했다. 그럴 것이 등산 차림을 한 사람이 남들이 다 내리는 산 입구에서 내릴 생각은 안하고 있으니 말이다. "반곡리에서 서울 가는 막차가 몇 시에 있지?"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아이처럼 나는 황황히 주머니에서 버스 표를 찾아 건네며 몸을 일으켰다. "네 시 반이오." 밀치듯 그렇게 안내원은 나를 땅바닥에 내던졌고 버스는 빈 차체를 덜컹.. 2022. 5. 25. 64. 어떤 솔거의 죽음 어떤 솔거의 죽음 -조정래 1 “여봐라, 이 성내에 쓸 만한 환쟁이가 있느냐!” 어느 날 성내를 조망(眺望)하고 있던 성주(城主)가 별안간 물었다. “환쟁이라니요?…” 성주 옆에 붙어 서있던 신하가 반문했고, 들러선 다른 사람들도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환쟁이를 몰라서 그러는 게냐!” 모두들 움찔했다. 성주의 음성에 노기가 묻어난 것이었다. 눈치 없이 데데하게 굴다가는 그 불덩이 같은 성미가 폭발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누구에겐가 불똥이 튈 것이고, 그 세례를 받은 자는 재수가 좋아야 파직이고, 옴붙었다 하면 볏짚 깔고 벽 바라보고 앉아서 사미인곡 읊는 처량한 귀뚜라미 신세가 될 판이었다. “예예, 있구 말구요. 새가 금방 후두둑 날아갈 듯이, 호랑이가 금방 우르릉 울 듯이, 사슴이 금방 깡충 뛸 듯이.. 2022. 5. 25. 63. 아메리카 아 메 리 카 -조해일 1 검문 헌병이 올라와서 위엄 있는 표정으로 한 바퀴 둘러보고 내려가자 버스는 다시 신음소리를 토하며 출발했다. 나는 움직이기 시작한 버스의 차창 밖으로 땅에 내려선 헌병의 모습을 흘낏 보았는데 그는 땅 위에서 외로와 보였다. 여름 한낮의 무거운 햇볕이 그의 위엄 있는 헬멧 위에 앉아 있었고, 아래로 내려뜨린 그의 흰 장갑 낀 손위에서 머뭇거리고 있었으며, 그는 고개를 약간 숙인 듯한 자세로 잠깐 서 있었다, 버스가 곧 속력을 내기 시작했으므로 그의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으나 나는 그가 대신 내 마음속으로 들어와 서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 마음속에서 그는 땅 위에 남아 조그맣게 서 있었다. "우리 유격대로선 너 같은 모범 조교를 떠나보낸다는 게 여간한 손실이 아.. 2022. 5. 25. 62. 시간 여행 시간(時間) 여행(旅行) 조세희 1 부엌에 많은 칼이 있다. 아니다. 주방에 많은 칼이 있다. 신애의 부엌은 없어졌다. 먼 옛날 이야기 같다. 신애도 한때는 부엌 아궁이에 장작을 넣어 잤었다. 뒤에 연탄을 썼다. 지금 신애네 연료는 가스와 기름이다. 중동의 어느 사막에 탄화수소로 파묻혀 있었던 기름은 긴 바다 여행을 해와 밝은 아파트단지 안에서 타 없어졌다. 아파트에는 부엌이 없다. 그 대신 멜라민 냄새가 나는 깨끗한 주방이 있는데 젊은 여자들은 쉽게 -키친-이라고 말했다. 깨끗한 신애의 주방에 열 일곱 개의 칼이 있다. 수납장 서랍에 넣어둔 열 두 개는 식사용 나이프이다. 베고 써는 것이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칼이 아니다. 무딘 날과 끝이 칼의 성격을 죽였다. 부엌에는 그런 칼이 없었다. 상투를 틀었던.. 2022. 5. 25. 이전 1 ··· 5 6 7 8 9 10 11 ··· 2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