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단편소설390

61. 성황당 성황당(城隍堂)-정비석 "제에길, 뭘 허구 송구 안와!" 순이는 저녁밥 짓는 불을 다 때고 나서, 부지깽이로 닫친 부엌문을 탕 열어 젖히며, 눈아래 언덕길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아래로 뻗은 길에는 사람은 커녕 개새끼 하나 얼씬하는 것 없었다. 한참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던 순이는 다시 아까와 같이 중얼거리면서 부엌 바닥을 대강대강 쓸어, 검부러기를 아궁에 지펴 넣는다. 그리고 나서 이번에는 빗자루를 든 채 뜰 아래로 나서더니, 천마령(天摩嶺) 위에 걸린 해를 쳐다본다. 산골의 해는 저물기 쉬웠다. 아침해가 앞산 위에 떴나 보다 하면, 벌써 뒷산에서는 해가 저물기 시작하였다. 그러기로 신새벽에 집을 나갈 때에 그렇게나 신신당부를 했으니, 여느 장날보다는 좀 일찍 돌아와야 할 것이고, 그러니까 이맘때에는 으.. 2022. 5. 20.
59. 농촌 사람들 농촌(農村) 사람들 - 조명희 1 아침에도 큰 두레 방석만한 벌건 해가 붉은 놀을 띠고 들 건너 동녘 봉우리 위로 쑥 솟아올랐다. 그것은 마치 이 세상을 -불-의 세계로 바꾸는 마당에 어떤 무서운 계시의 첫 광경 같이-, 그리하여 가뜩이나 말라 시들어 가는 여름철 넓은 세계의 생물들은 한때에 눈을 그리로 쏘며 다시 한번 더 떨지 아니할 수 없다. 「큰일 났다! 영영 사람을 다 죽이고 만다!」 들녘 사람들은 입을 여나 안 여나 다 이와 같은 말을 하게 된다. 밝음의 공포 - 백색의 공포는 오늘도 또 닥쳐왔다. 그러던 해가 벌써 한나절이 기울었다. 논밭에 곡식은 더 말할 게 없고 길옆에 풀도 냇가에 잔디도 말랑이(산마루)의 풀도 모두 말라 시들다가 나중에는 배배 꼬여 틀어져간다. 어떤 데는 가을 풀-모양으로.. 2022. 5. 20.
58. 내 그물로 오는 가시 고기 내 그물로 오는 가시 고기 -조세희 5시가 이미 넘었는데도 어두웠다. 여느 때면 내방 창에 첫빛이 와 닿고 커어튼이 그 빛을 올 사이사이로 빨아들여 방안의 어둠을 밀어 버릴 시간이었다. 나는 침대 머리맡의 수화기를 들고 주방으로 이어진 단추를 눌렀다. 아직 잠이 덜 깬 듯싶은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떨림판을 흔들어 왔다. 커피를 시키고 일어나 커어튼을 젖혔다. 창문을 덮었던 안개가 스멀스멀 밑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늙은 개가 안개 속에서 움직이는 것을 나는 내려다 보았다. 돌아간 할아버지의 개는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 느릿느릿 안개를 헤쳐 흐트려뜨렸다. 숙부가 독일의 어느 기업인에게서 선물로 받았다는 개였다. 숙부는 자기가 받은 선물을 다시 할아버지께 바치면서 족보를 밝혔는데, 개의 계보가 그 나.. 2022. 5. 20.
57.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조세희 1 사람들은 아버지를 난장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옳게 보았다. 아버지는 난장이였다.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아버지를 보는 것 하나만 옮았다. 그밖의 것들은 하나도 옳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 어머니, 영호, 그리고 나를 포함한 다섯 식구의 모든 것을 걸고 그들이 옳지 않다는 것을 언제나 말할 수 있다. 나와 (모든 것-이라는 표현에는 -다섯 식구의 목숨)이 포함되기 있다. 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건국을 생각했다. 단 하루라도 친국을 생각해 보지 않은 날이 없다. 하루하루의 생활이 지겨웠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활은 전쟁과 같았다. 우리는 그 전쟁터에서 날마다 지기만 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모든 것을 잘 .. 2022. 5.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