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단편소설390 18. 분녀 분 녀 -이효석 1 우리도 없는 농장에 아닌 때 웬일인가들 의아하게 여기고 있는 동안에 집 채 같은 돼지는 헛간 앞을 지나 묘포 밭으로 달아온다. 산돼지 같기도 하고 마바리 같기도 하여 보통 돼지는 아닌 데다가 뒤미쳐 난데없는 호개 한 마리가 거위영장 같이 껑충대고 쫓아오니 돼지는 불심지가 올라 갈팡질팡 밭 위로 우겨 든다. 풀 뽑던 동무들은 간담이 써늘하여 꽁무니가 빠져라 산지사방으로 달아난다. 허구 많은 지향 다 두고 돼지는 굳이 이쪽을 겨누고 욱박아 오는 것이다. 분녀는 기급을 하고 도망을 하나 아무리 애써도 발이 재게 떨어지지 않는다. 신이 빠지고 허리가 휘는데 엎친 데 덮치기로 공칙히 앞에는 넓은 토벽이 막혀 꼼짝 부득이다. 옆으로 빗빼려고 하는 서슬에 돼지는 앞으로 왈칵 덮친다. 손가락 하나 .. 2022. 4. 20. 17. 봉선화 봉 선 화-임옥인 아침마다 아무 것도 하기 전에 자리에 옹그리고 앉아 물그러미 서쪽 뜰을 내려다보는 것이 혜경의 습관이었다. 또 그것이 퍽 즐거운 일 중의 하나였다. 오늘 아침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뜰 안을 내려다보고 있다. 빨랫줄에 다람다람 맺힌 빗방울이 톡 치면 구슬같이 떨어질 것과 담장 및 널다란 호박잎에 골독고인 물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불과 다섯 평 밖에 안 되는 삼각형으로 된 뜰. 그 삼각형으로 된 땅의 한쪽 귀를 북돋아 화단 겸 채소밭을 만든 밭에는 벌레에 발린 핼쑥한 배추와 영양부족인 듯한 가냘픈 고추와 무가 질서 있게 심겨졌다. 옥수수도 다섯 대, 벌써 불그레한 수염이 드리운 걸 보면, 괘 여물어 가는 모양이다. 온 봄을 두고 조금식 솎아먹던 쑥갓이 노랗게 꽃피었다. 담장의 세 배나 .. 2022. 4. 20. 16. 복덕방 복덕방(福德房) -이태준 철썩, 앞집 판장(板牆, 널빤지로 대어 만든 울타리) 밑에서 물 내버리는 소리가 났다. 주먹구구(정밀하지 못하고 대강 하는 계산)에 골똘했던 안 초시(初試, 과거의 첫 시험 또는 그 시험에 합격한 사람)에게는 놀랄 만한 폭음이었던지, 다리 부러진 돋보기 너머로, 똑 먹이를 쪼으려는 닭의 눈을 해 가지고 수채(집안에서 버린 허드렛물이나 빗물이 흘러 나가도록 만든 시설) 구멍을 내다본다. 뿌연 뜨물에 휩쓸려 나오는 것이 여러 가지다. 호박 꼭지, 계란 껍질, 거피(껍질을 제거)해 버린 녹두 껍질. “녹두 빈자떡(빈대떡)을 부치는 게로군 흥……. 한 오륙 년째 안 초시는 말끝마다 젠장... 이녀석이 아니면 흥! 하는 코웃음을 잘 붙였다. “추석이 벌써 낼 모래지! 젠-장…… 안초시는 .. 2022. 4. 20. 15. 병신과 머저리 병신과 머저리 -이청준 화폭은 이 며칠 동안 조금도 메워지지 못한 채 넓게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 학생들이 돌아가 버린 화실은 조용해져 있었다. 나는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형이 소설을 쓴다는 기이한 일은, 달포 전 그의 칼끝이 열살배기 소녀의 육신으로부터 그 영혼을 후벼내 버린 사건과 깊이 관계가 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 수술의 실패가 꼭 형의 실수라고만은 할 수 없었다. 피해자 쪽이 그렇게 생각했고, 근 십 년 동안 구경만 해 오면서도 그쪽 일에 전혀 무지하지만은 않은 나의 생각이 그랬다. 형 자신도 그것은 시인했다. 소녀는 수술을 받지 않았어도 잠시 후에는 비슷한 길을 갔을 것이고, 수술은 처음부터 절반도 성공의 가능성이 없었던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런 사건은 형에게서뿐 아니라 수술 중엔 어.. 2022. 4. 20. 이전 1 ··· 16 17 18 19 20 21 22 2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