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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단편소설390

14. 매잡이 매 잡 이 -이청준 지난 봄 갑자기 세상을 등지고 만 민태준 형은, 그가 이승에 있었다는 흔적으로 단 한 가지 유물만을 남겨 놓고 갔었다. 아는 이는 다 알고 있는 일이지만 그것은 별로 값지지도 않은 몇 권의 대학 노트로 되어 있는 비망록이었다. 우리는 그가 원래 시골집에 논섬지기나 땅을 가지고 있었고, 처신에도 별로 궁기를 띠지 않았기 때문에 설마 옷가지 정리할 게 좀 남아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민 형의 임종 순간이 노트 몇 권밖에 남길 수 없을 만큼 비참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나이 서른넷이 되도록 결혼 살림도 내보지 못한 민 형은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주변을 말끔히 정리한 다음 스스로의 임종을 맞았으리라는, 어쩌면 그 임종은 민 형 자신에 의해 훨씬 오래 전부터 .. 2022. 4. 20.
13. 떠도는 말들 떠 도 는 말 들 -이청준 -언어사회학 서설 1- 똑, 똑, 똑 ……. 누군가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벌써 한 시간 이상이나 꼼짝도 않고 천장만 쳐다보고 드러누워 있던 지욱은 그러나 얼핏 몸을 일으키려 하지 않았다. 그새 사지가 모두 마비되어 버린 듯 생각을 따라주지 않았다. 그는 힘껏 짓눌러놓은 용수철처럼 긴장하고 있었다. 터무니없이 또 한 번 소리가 있기만 기다렸다. 골목길로 통해 있는 작은 들창문은 언제나 갈색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 창문 쪽에서는 다시 아무 기척도 없었다. 그냥 돌아가버린 것일까. 지욱은 그제서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커튼을 젖히고 들창문 유리로 골목길을 내다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없는 골목길에 언제부턴가 저녁 눈이 내리고 있었다. 초저녁 어스름이 깔.. 2022. 4. 18.
12. 들 들 -이효석 1 꽃다지, 질경이, 냉이, 딸장이, 민들레, 솔구장이, 쇠민장이, 길오장이, 달래, 무룻, 시금치,씀바귀, 돌나물, 비름, 능쟁이. 들은 온통 초록 전에 덮여 벌써 한 조각의 흙빛도 찾아볼 수 없다. 초록의 바다. 초록은 흙빛보다 찬란하고 눈빛보다 복잡하다. 눈이 보얗게 깔렸을 때에는 횐 빛과 능금나무의 자줏빛과 그림자의 옥색 빛밖에는 없어 단순하기 옷 벗은 여인의 나체와 같던 것이 - 봄은 옷 입고 치장한 여인이다. 흙빛에서 초록으로 - 이 기막힌 신비에 다시 한번 놀라볼 필요가 없을까. 땅은 어디서 어느 때 그렇게 많은 물감을 먹었길래 봄이 되면 한꺼번에 그것을 이렇게 지천으로 뱉어놓을까. 바닷물을 고래같이 들이켰던가, 하늘의 푸른 정기를 모르는 결에 함빡 마셔두었다가 그것을 빗물에 풀.. 2022. 4. 14.
11. 동행 -임철우 동행(同行) -임철우 네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아파트 단지 정문을 지나 백여 미터쯤 들어가면 길은 두 갈래로 나누어지고, 바로 거기 길이 나눠지는 지점에 서 있는 전화박스 곁에서 우리는 만나게 되어 있었다. 내가 너무 일찍 온 걸까.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세 시 오 분 전. 나는 조금 초조해하고 있었다. 집을 나와서 버스를 타고 와 그 자리에 서게 될 때까지 초조함은 줄곧 집요하게 목덜미를 잡아당기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다. 그건 훨씬 이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어젯밤 전화를 받는 순간부터, 아니 그보다도 더 먼저, 그러니까 네가 일 년 반만에 처음으로 나타났던 일주일 전의 그 충격적인 밤으로부터 나의 초조함은 이미 시작되었으리라. 너는 마치도 주술적인 힘을 지닌 북소리처럼 어둠 저편으.. 2022. 4.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