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단편소설390 81. 환상 여행 환상(幻想) 여행(旅行) -정소성 그는 친구 억(憶)이 여지껏 제주도에 살고 있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듯 멍한 표정에 붙잡혀 있다. 시외전화 접수부에 앉은 아가씨는 좨나 무관심한 표정을 주위에 흘리고 있다. 전화국 청사는 파도의 물빛에 반사되어 눈부실 정도로 새하얗게 빛났다. 접수부에 앉은 아가씨의 전신에서는 땟국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땟국물 위로 시선이 스치는 순간, 그녀의 피로와 그녀의 가난과 이 퇴락한 항구의 살벌함을 생각했다. 그녀의 인중, 그 빈약해빠진 윗입술의 홈 속에 돋아난 검은 사마귀는 고의 이런 순간적 생각을 급작스레 욱죄여주는 것 같아, 그는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렸다, 억은 지금도 제주도에 살고 있을까. 과연 그 녀석을 만날 수 있을까. 도대체 몇 년 만인가. 그는.. 2022. 5. 26. 80. 하늘 아래 그 자리 하늘 아래 그 자리 -전상국 1 수려한 강산의 한여름 그 푸름 속으로 구불구불 그림처럼 뻗어 나간 하얀 길 위를 걷고 있었다. 강의 흐름을 따라 굽이굽이 절경을 이룬 협곡의 그 깎아지른 듯한 절벽 틈틈이 허공을 향해 가지를 펼친 노송과 갈참나무 고목들, 더 안쪽 기슭으로는 무슨 나무라 가릴 것 없이 한데 어우러진 숲이었다. 그 울울한 녹음 밑을 돌돌 굴러 내린 골짜기 물이 강바닥 돌이끼까지 선명히 흐러내리는 해맑은 강물에 허리를 질러 합류하고 있었다. 부채꼴로 펼쳐진 흰 모래밭이 물빛을 더욱 푸르게 했다. 그 청청한 강물까지 내려가 몸을 담그지 않아도 가슴은 아름다운 강과 산 속에 숨쉬고 있다는 흥분으로 하여 차라리 그 외경스러움은 걷잡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얼굴에, 목에, 등줄기를 타고 땀이 비 오듯.. 2022. 5. 26. 79. 크라인씨의 병 크라인씨(氏)의 병(甁) 조세희 은강에는 장님이 많았다. 은강에 살면서 놀란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공업 지역에서는 물론 볼 수가 없었다. 시가와 주거 지역을 거닐다 나든 알았다. 어느 날 나는 십 분 동안에 다섯 사람의 장님을 보았다. 다음 십 분 동안에는 세 명을 보았고, 그 다음 십 분에는 나의 발 옆을 두드리며 지나는 둘밖에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한시간이상을 헤매고도 단 한 명의 장님을 볼 수 없는 도시가 세계에는 있을 것이다. 은강에 유독 장님이 많은 까닭을 나는 알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장님이 많다는 사실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들과 같은 시대에 자란 사람들 중에 장님이 많다는 사실을 은강 사람들은 몰랐다. 그래서 은강 사람들 모두가 장님으로 보일 때가 .. 2022. 5. 26. 78. 제도의 덫 제도(制度)의 덫 -정을병 그는 거울 조각 끝으로 열심히 조각을 하고 있었다. 칫솔대에다가 아름다운 여자의 나체를,,,,,, 거울 조각은 닳아서 손톱 크기만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두 손가락 사이에다 넣으면 거울은 전연 보이지 않았다. 유리의 뒷면에 은칠이 되어 있었지만 거의 벗겨져서 그냥 유리 조각인지 거울 조각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조각은 아주 정교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세상에 어떤 직업적인 조각가가 이렇게 정교하게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조각은 시간과 싸우는 작업이며, 혼신의 정력을 쏟아서 만드는 일이었다. 새끼손가락 굵기밖에 안 되는 칫솔대지만 마치 거대한 실물크기의 조가이나 조금도 다름이 없을 정도로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풍부한 머리는 풀어서 뒤로 젖혀 가지고 있었고, 두 팔을 위로 .. 2022. 5. 26. 이전 1 2 3 4 5 6 7 ··· 2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