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단편소설390 77. 전황당인보기 전황당인보기(田黃堂印譜記) -정한숙 1. 석운(石雲) 이경수(李慶秀)가 선비로서 야인(野人) 시절이랄 것 같으면 문방사우(文房四友)중 무엇이든 들고 가서, 매화옥(梅花屋) 뜰 한가운데 국화주(菊花酒) 부일배로 한담소일하면 옛 정리 그에 더할 것 없으련만, 석운이 벼슬을 했으니 지(紙) 묵(墨) 연(硯)을 즐길 여가가 있을 것 같질 않았다. 정표(情表)라기보다도 수하인(受荷人) 강명진(姜明振)은 벼슬한 친구에게 기념이 될 만한 것을 꼭 선사하고 싶었다. 애당초 시속적인 물건은 고를 생각도 없었고, 그것은 석운의 구미에도 맞을 것 같질 않았다. 석운에겐 물론, 자기 자신의 성미에까지 들어맞는 것을 골라내자니 매우 힘들었다. 연(硯)이라면 집에 있는 단계연(端溪硯)이 알맞겠지만, 그것만은 수하인으로서도 내놓을.. 2022. 5. 26. 76. 저기압 저기압(低氣壓) -조명희 생활난 직업난으로 수년을 시달려 왔다. 이 공황 속에서도 값없는 생활 - 무위한 생활로부터 흘러나오는 권태는 질질 흐른다. 공황의 한재를 넘으면 권태. 또 한재를 넘으면 권태. 생활(먹고사는 일)이라는 줄에 마소 모양으로 정신없이 돌아다볼 때, '이게 다 무슨 생활이란 것이야?...... 네가 참으로 생활다운 생활을 하려면 지금 네 생활을 저렇게 값없이 맨드는 현실-그 속을 정면으로 파고 뚫고 들어가서 냅다 한번 부디쳐 보든지 어찌든지. 밤낮 그 늘어진 개꼬리 모양으로 질질 끌고 가는 생활의 꼴이란 것은 참 볼 수 없다. 차라리 망골편으로 기울어지려면 떼카단이 되거나. 우로 올라붙든지 알로 떨어지든지 할 것이지 여름날 쇠부랄 모양으로 축-늘어져 매달린 생활!' 이 모양으로 폭백을.. 2022. 5. 25. 75.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 잘못은 신(神)에게도 있다 -조세희 나는 아주 단순한 세상을 그렸다. 아버지가 꿈꾼 세상보다도 단순했다. 달에 가서 친문대 일을 보겠다는 것이 아버지의 꿈이었다. 그 꿈을 이루었다면 아버지는 오십억 광년 저쪽에 있다는 머리카락의 성운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쌍한 아버지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다. 몸은 화장터에서 반 줌의 재로 분해되고, 영호와 나는 물가에 서서 어머니가 루려 넣는 재를 보며 울었다. 난장이 아버지가 무기물로 없어져 버리는 순간이었다 아버지는 생명을 갖는 순간부터 고생을 했다. 아버지의 몸이 작았다고 생명의 양까지 작았을 리는 없다. 아버지는 몸보다 컸던 고통을 죽어서 벗었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잘 먹일 수 얼었다. 학교에도 제대로 보낼 수 없었다. 우리 집에 새 것이.. 2022. 5. 25. 74. 자살파티 자살(自殺) 파티 -정을병 책방주인은 책방의 안쪽에 앉아 있었다. 주인이 앉은 자리는 입구에서 왼쪽으로 중간쯤 되는 곳이었다. 그러나 입구 쪽에다 비하면 구석지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아무리 이쪽에서 책을 들여다보고 있어도 주인은 아는 척하지 않았다, 책방에는 항상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주인이 원하기만 하면 이쪽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금방 알 수가 있었다. 고러나 주인은 별로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지는 않는 것 같았다. 이기영은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인기가 있는 소설류는 입구 쪽의 넓은 자리에 진열되어 있으니 아무나 한시간 가량 읽는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지만 사전류는 안쪽에 있어서 부득이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주인은 턱이 파래로 내려앉은 데다가, 아래턱이 앞으로 나와.. 2022. 5. 25. 이전 1 2 3 4 5 6 7 8 ··· 2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