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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단편소설390

73. 잃어버린 황혼 잃어버린 황혼(黃昏) -정소성 눈을 뜨니 시커먼 황혼이 시야에 들어온다. 다시 눈을 감는다. 창문에 내리는 빗방울소리가 고요히 방안에 번지고 있다. 아래층 시계추소리는 이 을씨년스러운 공간에 내려앉은 정적을 정확한 단위로 잘라서 시간의 뒤안길로 팽개치고 있다. 한기가 온몸을 휘감아온다. 불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길수씨의 코고는 소리가 들린다. 간혹 어둠 속으로 흩어져 나오는 그의 신음 같은 잠꼬대는 내 가슴의 바닥을 우울의 심연으로 끌어내리는 것 같다. 그가 누운 쪽에서 악취가 풍겨온다. 땀 냄새, 오물 냄새, 소주 냄새가 범벅되어 견딜 수 없는 역겨움을 준다. 다시 눈을 떠본다. 미명이 빗소리를 머금은 채 창문에 닿아 있다. 침을 삼켜본다. 목이 칼칼하다. 입안의 악취가 뱃속까지 스며들어 구역질을 .. 2022. 5. 25.
72. 은강 노동가족의 생계비 은강 노동가족(勞動家族)의 생계비(生計費) -조세희 영희의 이야기를 나는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영희는 독일 하스트로 호수 근처에 있다는 릴리푸트 읍 이야기를했 다. 자세히 듣지 않아도 슬픈 이야기였다. 돌아간 아버지를 생각하면 언제나 눈물이 나려고 했다. 릴리푸트 읍은 국제 난장이 마을이다. 여러 나라의 난장이들이 그곳에 모여 살고 있다. 키가 칠십 팔 센티미터로 세계에서 제일 작은 사나이인 터어키인 난장이도 최근에 그곳으로 이주했다. 릴리푸트 읍의 난장이 인구는 늘어만 간다. 릴리푸트 읍을 제외한 곳은 난장이들이 살기에 모든 것의 규모가 너무 커서 불편하고 또 위험하다. 난장이들에게 릴리푸트 읍처럼 안전한 곳은 없다. 집과 가구는 물론이고, 일상 생활 용품의 크기가 난장이들에게 맞도록 만들어져 있다... 2022. 5. 25.
71. 육교 위에서 육교(陸橋) 위에서 -조세희 신애는 시내 중심가를 걸으며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녀가 볼 수 있는 것은 사람, 건물, 자동차뿐이었다. 거리에서는 기름타는 냄새, 사람 냄새, 고무 타는 냄새가 났다. 잠시 서서 주위를 둘러보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인도에 사람들이 넘치고, 차도에 자동차들이 넘쳤다. 몸둘 곳이 없었다. 단 몇 초 동안이라도 걸음을 멈추고 우울을 달랠 곳이 없었다. 병원에 가는 길이었다, 밑의 동생이 입원을 했다. 아직 마흔도 안 된 나이인데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잠도 자지 못했다 동생은 내과 의사들만 찾아다녔다. 위가 나빠져 음식을 소화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의사들을 찾아다녀도 동생의 병은 좀처럼 낫지 않았다. 육십 삼 킬로그램이었던 몸무게가 오십 일 킬로그램으로 줄었다... 2022. 5. 25.
70. 유형의 땅 유형(流刑)의 땅 -조정래 “이 늙고 천헌 목심 편하게 눈감을 수 있도록 선상님, 지발 굽어살펴주씨요. 요리크름 빌팅께요” 영감은 부처님 앞에 합장을 할 때보다 더 간절하고 애타는 심정으로 손을 모았고, 그것도 부족한 것 같아 그만 바닥에 무릎까지 꿇었다. “영감님, 왜 이러십니까. 딱한 사정 충분히 알았으니 어서 의자로 올라앉으십시오” 원장은 당황한 몸짓으로 영감을 일으켜 세우려 했다. “선상님, 지발 딱부러지게 맡아주시겄다고 말씸해 주시씨요” 영감은 몸을 더욱 오그리며 애원하고 있었다. “……알겠어요. 맡도록 하지요” 원장은 착잡한 표정으로 어렵게 대답했다. “고맙구만이라, 선상님. 이 하늘같은 은혜 저 시상에 가서라두 잊어뿔지 안컸구만이라” 가슴께에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고 앉은 자세로 영감은 .. 2022. 5.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