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수필 672 바람개비 바람개비 /김일산바람이라도 쐴까, 간단한 채비만 꾸려 떠났다. 먼 산 위 바람의 언덕에 거대한 풍력 발전기가 우뚝 섰다. 프로펠러가 멈춘 채 바람을 기다리는 모습에서 어린 시절의 나를 떠올린다. 바람개비를 만들었다. 헛간에서 마른 수숫대를 한 뼘 길이로 잘랐다. 질긴 껍질 안에는 부드럽고 하얀 속살이 가득 찼다. 대빗자루에서 가느다란 줄기 하나를 꺾고 부엌에서 밥알 몇 개를 떼어 입에 물었다. 종이의 중심점에 밥알 하나를 짓이겨 문질렀다. 미리 잘라놓은 네 개의 종이 귀를 차례로 당겨 붙였더니 바람 먹을 입이 되었다. 다 만들어 벽에 걸어두었다. 어서 아침이 오기를 기다리느라 잠이 오질 않았다. 눈을 뜨자마자 바람개비를 돌리고 싶었다. 바람개비를 만들 때는 바람이 항상 불 것으로 생각했다. 바람이 불지 .. 2024. 10. 3. 그냥 둘 걸 그냥 둘 걸 / 이일배 두렁길을 걷다 보니, 쇠뜨기 방동사니 깨풀 괭이밥 개갓냉이 돌나물 등 온갖 풀들이 자욱한 곳에 홀로 우뚝 서서 분홍색 꽃을 뿜어내듯이 피우고 있는 풀꽃 하나가 보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청춘의 사랑’이라는 꽃말을 가진 ‘끈끈이대나물’이라는 풀꽃이었다. 가늘게 뻗어 올린 꽃가지가 마주 난 잎을 사이에 두고 갈래가 지면서 다시 뻗어 올라 다섯 잎의 아기 새끼손가락 같은 꽃잎을 피워내고 있다. 들꽃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분홍빛이 시리게 고와 눈에 얼른 들 뿐만 아니라, 키도 다른 풀보다 유달리 커 끌리지 않을 수 없다. 저 꽃이 어찌 저 자리에서 피어났을까. 다른 풀보다 높이 솟기도 했지만, 꽃 빛도 주위의 풀들을 압도하고 있다. 풀씨가 하늘을 날다가 자리를 잘못 짚고 떨어져 피.. 2024. 10. 3. 새로운 증거 새로운 증거 / 윤이나 - 2024 대한민국독도문예대전 대상사과꽃이 한창이다. 하얗게 길 밝히는 꽃길을 따라 몇 구비 더 도니 여강 이씨 집성촌 기북면 덕동마을이다. 마을을 품은 산이 병풍을 친 듯하고 고풍스러운 기와집이 낮은 담을 이웃해 옹기종기 모여 산다. 마을 앞은 향나무 은행나무 소나무 등이 어우러져 풍경이 되고 시냇물은 그 시작도 끝도 먼 먼 시간을 이어 흐르고 있다. 멋스러운 자연을 뒤로하고 민속박물관으로 향한다. 입구에서 예닐곱 걸음 내딛어 전시관에 들어선다. 얼핏 눈에 들어온 모습이 옛 생활용품을 모아둔 여느 민속박물관과 다르지 않은데, 박물관 초입에서 허리 높이 되는 대형 유리함이 나를 반긴다. 드디어 '해좌전도海左全圖' 목판본을 만난다. 백 육십여 년 전에 만든 지도라 믿기지 않을 정도.. 2024. 9. 12. 가을편지 가을편지 / 조미순 한바탕 비가 오려나. 몸이 찌뿌듯하다. 몇 차례 수술 후에도 오른쪽 무릎엔 통증이 여전하다. 불편한 걸음걸이가 골반과 허리까지 뒤틀어 놓는다. 습관처럼 진통제를 입에 털어 넣는다. 나처럼 연식이 오래된 차에 시동을 걸고 녀석에게로 간다. 이런 날 운전대를 잡으면 생각이 많다. 손자 공부를 좀 더 봐주려면 건강이 받쳐줘야 할 텐데. 참나무 원목 표고버섯 생산량이 줄어 쪼그라드는 친정 형편은 어쩌나. 탈장 수술 후 장에 구멍이 생겨 재수술에 들어간 오빠는……. 답답한 속내 때문에 차창을 연다. 가로수와 드잡이하던 바람이 운전석으로 들이친다. 뭔가 따라 들어온다. ‘낙엽새’다. 바스락대는 가을이 손끝에 만져진다. 220년 전 한 남자의 가을 편지가 가슴에서 물소리를 내는 이즈음이다. 조.. 2024. 9. 12. 이전 1 2 3 4 5 6 7 8 ··· 1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