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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 672

내 신경은 버드나무처럼 흔들거리고 해파리처럼 투명해요 내 신경은 버드나무처럼 흔들거리고 해파리처럼 투명해요./남영신최근 일을 시작했다. 해외 자료를 조사하고 번역하고 문서를 정리하는 등, 대학원 조교가 할만한 일. 되게 별것 아닌 일들 같은데 간단해 보이는 지시들이 좀처럼 한번에 이해되지 않았다. 학부에서도 대학원에서도 조교를 한적이 없어서 그런지 일이 서툴고 어색하다. 각주도 그냥 이렇게 하면 된다는게 정확히 무슨 말일까요? ‘이렇게 한다는 것’이 의미할 수 있는 몇가지 가능성을 생각하고 나서 너무 바보 같아 보이지 않게 몇개의, 가장 개연성 높은 가능성에 대해서만 질문한다. ‘아하, 이렇게 하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럼 뒤에 ‘그래요’나 ‘맞아요’ 등이 나와줬으면 좋겠는데 ‘아니요’라는 말이 나오면 당혹스럽다. 한번 못 알아듣고 두 번 못 알아듣는 것까지.. 2024. 9. 2.
서사에 대한 서사 서사敍事에 대한 서사 / 현정원 소설을 읽다 움찔한다. 도서관에서 빌린 다섯 권 중, 마수걸이로 뽑아 든 『칼의 노래』를 읽다 심쿵한 거다. 소설 속 포로들은 시신을 옮기며 울었다. 늙은 포로도 울었고 젊은 포로도 울었다. 주려서 퀭한 두 눈에 눈물을 고이고 메마른 소리로 울었다. 그 모습을 보며 서술자, 이순신 장군은 참담했다.  내가 그 개별성 앞에서 무너진다면 나는 나의 전쟁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때, 나는 칼을 버리고 저 병신년 이후의 곽재우처럼 안개 내린 산속으로 숨어 들어가 개울물을 퍼 먹는 신선이 되어야 마땅할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의 적은 적의 개별성이었다. 울음을 우는 포로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적의 개별성이야말로 나의 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장군의 ‘나의 적은 적의 개.. 2024. 8. 28.
사두족 엄지 이야기 사두(蛇頭)족 엄지 이야기 / 김영욱 - 제3회 우하 박문하 문학상 대상 남자의 시선이 봉을 잡고 있던 내 왼손 엄지와 자신의 엄지를 오갔다. 난 반사적으로 봉에서 얼른 손을 떼고 주먹을 말아 쥐고 엄지를 밀어 넣었다. 곧바로 남자의 얼굴에는 뱀이라도 본 듯한 표정이 스쳤다. 낯선 이로부터 시선의 봉변을 당한 나 역시 불콰한 낯빛을 감출 수 없었다.  덜컹거리는 지하철에서 움쩍달싹 못하고 사람들 틈바구니에 서 있는 내내 숨이 막혔다. 출근길만 아니라면 어떻게든 땅꾼의 자루 같은 답답한 그곳에서 빠져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정거장마다 고개를 밀고 들어 닥치는 인파에 뒤로 밀리다 못해 발마저 디딜 곳을 놓치고 말았다. 그 바람에 그 남자의 다리에 내 다리가 꼬였지만, 지하철의 속도에 따라 비스듬히 쏠리는 기울.. 2024. 8. 27.
공/이영자 뒷산을 등진 도산서원의 원경이 고즈넉하다. 오른편에는 탁 트인 안동댐이 있어 산과 강을 낀 배산임수다. 양지바른 터에 오백 년 해묵은 서원이라니! 빛바랜 나뭇결조차 역사의 숨결이 살아있는 곳 같아 옷깃을 다시 여민다.   인접한 안동댐 가장자리에 섬처럼 솟은 ‘시사단’이 보인다. 시사단은 ‘도산별과’를 기념하기 위한 장소였다. 댐 공사를 하면서 수몰 위기에 처하자 건물에 축대를 쌓고 그 위에 본래의 모습을 살려냈다. 그 모습이 아침 햇살 받은 윤슬 위에서 호수의 배꼽처럼 반짝인다. 저기에 올라 시 한 수 읊고 싶은 시심(詩心)이 일어난다.    안동을 ‘정신문화의 고향’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를 찾고자 떠나온 탐방이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도산서원의 숨은 뜻을 만나볼 요량이다. 멀리서 서원을 .. 2024. 8.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