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수필 672 비밀과 거짓말 비밀과 거짓말 / 정아경"어디 가세요?”또·또…… 뱉어놓고 나서 입을 막는다. 나는 입버릇처럼 이 말을 자주한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그럭저럭 안면만 있는 사람을 만나도, 엘리베이터 안에서 누군가 만나도 이 말을 한다. 그러면 상대는 상황에 따라 대답이 달라진다. ‘시장가요.’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멋쩍어 얼버무리다 1층에 닿아 황급히 내리는 이도 있다. 내 취향이 특이해서 남의 사생활을 파고자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단지 오래된 습관일 뿐이다. 나름대로는 더 가깝다는 친근함의 표시이기도 하다.며칠 전이다. 술 한잔하자는 친구의 전화에 신이 났다. 9시 30분, 저녁 챙겨주고 들뜬 마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탔다. 친구들 만나 늦은 밤까지 수다 떨 생각에 발보다 마음이 더 서둘렀다. “어디 가세요?” 먼.. 2024. 9. 7. 학이 춤추는 동래 학이 춤추는 동래 / 김영욱 - 제2회 우하 박문하 문학상 피리소리가 흐르자, 양팔을 좌우로 펼치고 한 발을 가볍게 들어올렸다. 이내 날렵한 버선코가 하늘을 향하자, 다른 발이 뒤꿈치가 들리며 바닥을 박차고 날아오를 듯하다. 펄럭이는 흰 소매는 날개 같고, 돌아설 듯 머뭇거리다 핑그르르 제자리를 도는 품새가 한 마리 새라도 된 듯하다. 과연 갓 쓰고 도포 입은 선비인가, 멋 좀 부릴 줄 아는 한량인가? 글쎄, 부잣집 종손으로 태어난 할아버지는 기방출입이 잦았다고 했다. 아쉬울 게 없으니, 물 쓰듯 인심도 쓰고 다니셨다고 했다. 본마누라는 하동에 두고 진주, 순천, 부산에도 갈 곳을 만드셨으니, 인생 자체가 풍류였음은 세상물정 모르는 삼척동자도 짐작이 가능하리라. 그런 할아버지는 어느 날 맏손녀인 내가 외.. 2024. 9. 5. 하현달 아래서 하현달 아래서 / 김애자 그이는 하현달 아래서 생의 층계를 내려가고 있다. 희미한 그림자를 앞세우고 천천히 가벼운 걸음으로 내려가고 있다. 가장으로서의 책임, 직장이란 조직에서 성과 비율에 따른 경쟁과 갈등에서 벗어난 지 25년이다. 그 무방한 세월이 그를 달관시켰다. 어제와 그제, 그리고 오늘과 내일이 별반 다르지 않다. 굴곡 없는 수평적인 일상의 연속이지만 그는 높은 것과 낮은 것의 차이란 결국엔 아무 것도 아니란 것을 안다. 부자란 개념도 현재 내가 가진 것보다 더 원하지 않으면 평온한 삶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가을 산에서 나뭇잎 떨어지는 걸 보고 깨달았다고 한다. 가을이 깊어지면 나무들은 열매와 잎을 모조리 땅으로 내려 보낸다. 다 털어버리고 가벼워져야 폭설과 삭풍에 다치지 않음을 스스로 .. 2024. 9. 4. 해바라기 연가 해바라기 연가 / 허정열 커다란 얼굴에 노란 미소가 가득했다. 화단에서 해바라기와 눈 맞춤은 자석처럼 나를 끌어당겼다. 반가운 친구를 만난 듯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수십 개의 황금빛 꽃잎과 노란 수술이 씨앗을 호위병처럼 에워싸고 있는 모습은 마치 태양이 내려온 듯 눈이 부셨다. 울울창창 푸른 여름에 돋보이는 해바라기 무리였다. 누군들 해맑은 아름다움에 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 외출 나가는 중이라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약속 때문에 황급히 자리를 떴지만, 그 여운은 아쉬움 대신, 장기기억 속으로 숨어들었다. 행사장 일을 돕다가 화환에 꽂혀 온 해바라기에 자꾸 마음이 쏠렸다. 여러 꽃과 어울려 있어도 환하게 눈에 띄는 노랑의 유혹. 이미 꺾여 제2의 생이 시작되었지만 아름다움은 여전했다... 2024. 9. 2. 이전 1 ··· 3 4 5 6 7 8 9 ··· 1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