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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5105

술꾼, 글꾼 술꾼, 글꾼 - 노정숙 폭음을 했다. 몸이 한물간 건지 한 순간에 확 가벼렸다. 3차로 간 라이브 카페에서 옛날 노래를 들으며 그 시절로 돌아갔나 보다. 단발머리 시절에 문학의 밤에서 들었던 ‘Take me home country road’, 조금 더 커서 좋아했던 노래 ‘님은 먼 곳에’를 들으며 열렬하게 박수를 쳤다. 처음 마신 커티샥이라는 위스키가 부드럽게 넘어갔다. 병에 그려진 범선을 보며 내 역마살이 조져서 더 들떴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 전에 소주를 한 병 정도 마신 듯하다. 초저녁부터 작정하고 마신 술이 알딸달 기분 좋은 순간도 없이 다음 단계로 넘어 갔다. 그 좋은 술을 마시고 왜 꺼내놓느냐고 했던 게 언제였던가. 머리가 어질어질한 건 참을 수 있다. 속이 울렁울렁 파도를 타며 마구마구 게.. 2022. 9. 29.
봉과 왕 봉과 왕 -노정숙 가끔 가는 식당에서 번개모임을 했다, 낮술을 한잔하며 시킨 해물숙주볶음이 접시바닥에 착 까부라진 채 한쪽으로 쏠려서 나왔다.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후배가 나섰다. 2만 5천 원짜리 안주가 이건 아니라고 항의를 했다. 잠시 후 새로 만든 숙주볶음이 제대로 된 모습으로 나왔다. 숙주에 문제가 있었다면서 사과를 하고 서비스로 문어 한 접시를 갖다 준다. 나는 이럴 때 낯붉히는 게 두려워서 항의하지 않고 그 식당을 다시는 가지 않는다. 내게 제명될 식당을 후배가 구해준 셈이다. 오래 전, 친구들과 해수욕장에 갔을 때다. 내가 수박을 사왔는데 속이 덜 익어 씨가 허옇다. 나는 버리고 말자고 했는데 친구가 반으로 쩍 갈라진 수박을 들고 수박가게로 갔다. 그 당시 유원지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 2022. 9. 29.
노천탕에서 노천탕에서 -노정숙 마을버스 은수랑 두 번째 여행 중에 학가산 온천을 들렀다. 안동시에서 만들었다는데 깔끔하고 쾌적하다. 샤워를 하고 노천탕으로 갔다. 넓은 탕에는 두 어르신이 앉아 있다. 서로 어디에 사느냐며 수인사를 나누었다. 두 분 다 안동의 종손며느리로 연륜이 곱게 내려앉았다. 한 분이 손을 내밀며 화려한 네일아트를 자랑하신다. 딸이 생일선물로 해줬는데 앞으로 계속 해야겠다고 하신다. 고우시다고 한껏 칭찬을 해드렸다. 곁에 계신 갸름한 얼굴의 친구 분은 예쁜 건 다 지나갔고, 아픈 곳이나 없으면 좋겠다고 한다. 1900년생 미국의 초상화가 엘리스 닐은 80세에 옷 벗은 자화상을 그렸다. 파란색 줄무늬 의자에 앉아 흰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 올리고 손에는 붓과 흰 천을 들고 있다. 평론가들은 흰 천이.. 2022. 9. 29.
겨울 감나무 겨울 감나무 –조다남[매일 시니어 문학상] 친정집 사랑채 앞에 아름드리 감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나무는 품이 넓어 우리 가족에게 오뉴월 뙤약볕을 피하게 해주는 든든한 가림막이 되었다. 가을볕에 감이 익어 갈 때면 형제들은 빨리 홍시를 달라고 조르듯 수시로 감나무를 올려다보곤 했다. 자랄 때 즐겨 먹었던 홍시 맛 때문에 지금도 해마다 철이 되면 감을 사 먹는다. 올해도 대봉감 한 상자를 들여 놓으니 마음이 넉넉해졌다. 감은 열흘쯤 지나 몇 개씩 주황색에서 빨강색으로 변하며 육질이 말랑말랑해져 달콤한 홍시가 되었다. 얇은 겉껍질을 벗기고 입에 넣는 순간 찰진 속살이 혀에 감겼다. 맛있는 홍시이지만 먹을 때마다 아버지의 말씀이 떠오른다. 우리가 자랄 때 아버지는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했다. .. 2022. 9.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