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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119

40. 멋 설 멋 설 조지훈 …하늘이 드높아 가니 벌써 가을인가 보다. 가을이 무엇인지 내 모르되 잎이 진 지 오래고 뜰 앞에 두어 송이 황국이 웃는지라 찾아오는 이마다 가을이라 이르니 나도 가을이라 믿을 수 밖에 없다. 촛불을 끄고 창 앞에 턱을 괴었으니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다시 왜 사는가. 문득 한 줄기 바람에 마른 잎이 날아간다. 유위전변- 바로 그것을 위해서 모든 것이 사나 보다. 우주의 원리 유일의 실재에다 ‘멋’이란 이름을 붙여 놓고 엊저녁 마시다 남은 머루술을 들이키고 나니 새삼스레 고개 끄덕여지는 밤이다. 산골 물소리가 어떻게 높아 가는지 열어젖힌 창문에서는 달빛이 쏟아져 들고, 달빛 아래는 산란한 책과 술병과 방우자가 네 활개를 펴고 잠들어 있는 것이다. ‘멋’, 그것을 가져다 .. 2021. 12. 14.
39. 먼 곳에의 그리움 먼 곳에의 그리움 전혜린 그것이 헛된 일임을 안다. 그러나 동경과 기대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무너져 버린 뒤에도 그리움은 슬픈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나는 새해가 올 때마다 기도 드린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게 해 달라고……. 어떤 엄청난 일, 무시무시하도록 나를 압도시키는 일, 매혹하는 일, 한마디로 '기적'이 일어날 것을 나는 기대하고 있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모험 끝에는 허망이, 여행 끝에는 피곤만이 기다리고 있는 줄은 잘 안다. 그리움과 먼 곳으로 훌훌 떠나 버리고 싶은 갈망, 비하만의 시구(詩句)처럼 '식탁을 털고 나부끼는 머리를 하고' 아무 곳이나 떠나고 싶은 것이다. 먼 곳에의 그리움(Fernweh)! 모르는 얼굴과 마음과 언어 사이에서 혼자이고 싶은 마음! 텅 빈 위(胃.. 2021. 12. 14.
38. 맑은 기쁨 맑은 기쁨 법정 저녁 예불을 마치고 앞마루로 나가다가 이제 막 떠오르는 열나흘 달을 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개인 하늘가, 앞산 마루 위로 떠오르는 둥근 달을 보고 너무 반가워서 월광보살(月光菩薩)을 뇌이면서 두 손을 마주 모았다. 여름날 해거름에 더욱 부드럽고 아련하게 보이는 앞산 능선 위로 떠오르는 달은 사뭇 환상적이다. 우리네 고전적인 표현에 달덩이같이 예쁜 얼굴이란 말이 있는데, 소박하면서도 적절한 묘사인 것 같다. 오랜만에 떠오르는 달을 바라보니 그저 고맙고 기쁘다. 뒷숲에서 소쩍새가 운다. 쭉쭉쭉쭉 머슴새도 운다. 산은 한층 이슥해진다. 이런 때 나는 홀로 있음에 맑은 기쁨을 누린다. 억지소리 같지만, 홀로이기 때문에 많은 이웃들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이다. 어디 사람만이 이웃이랴. 청청.. 2021. 12. 14.
37. 막내의 야구방망이 막내의 야구방망이 정진권 어느날 퇴근을 해 보니, 초등학교 5학년의 개구쟁이칠팔 명이 마루에 둘러앉아 있었다. 묻지 않아도 막내의 동무애들이었다. 그날 저녁에 막내는 야구 방망이 하나만 사 달라고졸랐다. 조르는 대로 다 사 줄 수는 없는 일이지만 너무도 간절히 원하기 때문에 나는 사 주마고약속을 했다. 그리고 다음날 퇴근을 할 때 방망이 하나를 사다 주었다. 그 다음날부터 막내는 늦게 돌아왔다. 어떤 때는하늘에 별이 떠야, 방망이에 글러브를 꿰어메고 새카만 거지 아이가 되어 돌아오는 것이다. 그리고는 한 삼 년 굶은 놈처럼 밥을퍼 먹었다. "왜 이렇게 늦었니?" "야구연습 좀 하느라고요." "이캄캄한 밤에 공이 보이니?" "……." "또이렇게 늦으면 혼날 줄 알아." "……." 그러나그 다음날도 여전히 .. 2021. 12.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