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수필119 28. 달밤 달밥 윤오영 내가 잠시 낙향(落鄕)해서 있었을 때 일. 어느 날 밤이었다. 달이 몹시 밝았다. 서울서 이사 온 윗마을 김 군을 찾아갔다. 대문은 깊이 잠겨 있고 주위는 고요했다. 나는 밖에서 혼자 머뭇거리다가 대문을 흔들지 않고 그대로 돌아섰다. * 달밤의 외출 맞은편 집 사랑 툇마루엔 웬 노인이 한 분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달을 보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그리로 옮겼다. 그는 내가 가까이 가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아니했다. "좀 쉬어 가겠습니다." 하며 걸터앉았다. 그는 이웃 사람이 아닌 것을 알자, "아랫마을서 오셨소?" 하고 물었다. "네, 달이 하도 밝기에······." "음! 참 밝소." 허연 수염을 쓰다듬었다. 두 사람은 각각 말이 없었다. 푸른 하늘은 먼 마을에 덮여 있고, 뜰은 달빛에 젖어.. 2021. 12. 14. 27. 단념 단념 김기림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별 게 아니었다. 끝없이 단념해 가는 것. 그것뿐인 것 같다. * 살아가는 것은 끝없는 단념 산 너머 저 산 너머는 행복이 있다. 언제고 그 산을 넘어 넓은 들로 나가 본다는 것이 산골 젊은이들의 꿈이었다. 그러나 이윽고는 산 너머 생각도 잊어 버리고 '아르네'(감성적이며 먼 곳을 동경하는 순진한 젊은이를 상징하는 소설 속의 인물. 노르웨이의 작가 비에르손이 쓴 소설 「아르네」의 주인공)는 결혼을 한다. 머지 않아서 아르네는 사오 남매의 복(福) 가진 아버지가 될 것이다. 이렇게 세상의 수많은 아르네들은 그만 나폴레옹을 단념하고 셰익스피어를 단념하고 토머스 아퀴나스를 단념하고 렘브란트를 단념하고 자못 풍정낭식(風定浪息. 들떠서 어수선하던 것이 가라앉음을 이르는 말)한 생.. 2021. 12. 14. 26. 다시 나의 전설 슈바빙 다시 나의 전설 슈바빙 전혜린 요새 같은 염열(炎熱, 몹시 심한 더위)의 날씨에는 뮌헨에 대한 나의 향수가 더 짙게 느껴진다. 덥지 않은 도시, 안개 낀 비가 자욱이 가려 덮고 있는 도시, 이것이 내 마음속에 아로새겨진 뮌헨의 이미지다. 거기가 그립다. 방학에 만약 그곳에 다시 갔다 올 수 있으면…… 이런 공상을 해 본다. *슈바빙에 대한 그리움 내가 4년 살았던 동네(독일 유학 기간 중 거주한 곳)는 슈바빙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그곳 뮌헨 대학교 미술 대학 주립 도서관을 비롯해 많은 새 책방과 헌책방, 화랑 등으로 특징지어진 뮌헨 문화의 심장부이며 또 가난한 학생과 대학생들, 이방인들이 모여서 사는 이색적인 지대이기도 했다. 뮌헨의 다른 구는 비교적 미국이나 유럽의 다른 도시와 구별이 없으나 이 슈바.. 2021. 12. 14. 24. 누에와 천재 누에와 천재 유달영 서당에 다니는 내가 긴 머리 꼬리를 잘라 버리고 외숙을 따라서 충청도로 갔을 때에 생긴 우스운 이야기의 한 토막이다. 나는 거기서 간이한(간단하고 쉬운) 산술과 일어를 얼마 동안 익혀 가지고 보통학교 1학년에 중도 입학을 하였다. 내 외숙은 일찍 개화한 분이며, 내 외숙모는 외숙의 지시로 신식법으로 누에를 여러 장 쳐서 적지 않은 수입을 올렸다. 작은 개미 같은 새까만 어린 누에들을 누에씨에서 쓸어 낸 것이 며칠 안 되는 성싶은데, 벌써 손가락만큼씩 큰 누에들이 손바닥 같은 뽕잎을 서걱서걱 먹어 내려가고 있는 것이 신기하고도 대견스러웠다. 내가 외숙모 옆에 서서 잠박(누에 채반)에 가득 찬 누에들을 보고 있노라면, 깊은 밤에 창밖에 내리는 봄비 소리를 듣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곤 .. 2021. 12. 13. 이전 1 ··· 19 20 21 22 23 24 25 ··· 3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