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2021신춘 문예 단편소설 , 수필, 시 등 당선작137 71. 양지의 꿈 양지의 꿈 천경자 아침나절에 눈이 살풋이 내리더니 날씨가 포근하고 어느덧 하늘은 코발트 그레이로 개며 햇볕이 쬔다. 오랫동안 난로의 온기에 생명을 의지해 오던 고무나무와 포인세티아 화분을 햇볕 드는 곳으로 옮겨 주었다. 포인세티아는 잎이 다 떨어진 채 후리후리한 키에 빨간 꽃만 이고 있는데 바람이 불면 바람개비가 되어 뱅뱅 돌 것만 같다. 뜰의 장미나무는 뿌리 언저리에 덮어 준 노란 왕겨와 그 위에 아직 녹지 않아 힐낏힐낏 햇볕을 받고 흰 빛깔로 반짝거리는 눈을 이불 삼아, 잠자고 있는 듯 섰어도 어딘지 봄 냄새를 풍긴다. 좁은 마당 한가운데 큰 고무 대야를 내다 놓고, 더운 물을 붓고 가루비누를 풀어 빨래를 했다. 늘 방구석에 화분처럼 앉아서 그림을 그리거나 생각에 잠겨만 있다가 이렇게 포근한 양지.. 2022. 1. 27. 70. 야채 트럭 아저씨 야채 트럭 아저씨 박완서 매일 아침 하던, 등산이라기보다는 산길 걷기 정도의 가벼운 산행을 첫눈이 온 후부터는 그만두었다. 산에 온 눈은 오래 간다. 내가 다시 산에 갈 수 있기까지는 두 달도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걷기는 내가 잘 할 수 있는 유일한 운동이지만 눈길에선 엉금엉금 긴다. 어머니가 눈길에서 미끄러져 크게 다치신 후 칠팔 년간이나 바깥출입을 못하다 돌아가시고 나서 생긴 눈 공포증이다. 부족한 다리 운동은 볼일 보러 다닐 때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니거나 지하철 타느라 오르락내리락하면서도 벌충할 수 있지만 흙을 밟는 쾌감을 느낄 수 있는 맨땅은 이 산골 마을에도 남아 있지 않다. 대문 밖 골목길까지 포장돼 있다. 그래서 아침마다 안마당을 몇 바퀴 돌면서 해뜨기를 기다린다. 아차산에는 서울사람.. 2022. 1. 27. 69. 섬인 채 섬으로 서서 섬인 채 섬으로 서서 변해명 남해 바다는 파도의 여운조차 없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하늘을 닮은 바다, 바다를 닮은 섬들, 그리고 섬 기슭에 정박한 작은 배들은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했다. 나는 일찍이 바다를 보았지만 이처럼 아름답고 아기자기하고 이야기가 담긴 바다를 보기는 처음이었다. 남해는 처음인데 내가 태어나고 살았던 고향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언제고 돌아와 쉬고 싶은 마음을 떠올리게 하기도 했다. 남해 바다엔 파도가 없었다. 파도가 없는 바다는 격정이나 격렬함이 없었다. 그립고 안타깝게 기다리며 애태우는 흔들림이 없고 마음을 비운 넓은 가슴과 흔들리는 모든 것들을 포용하고, 따뜻함으로 머무르게 하는 몸짓만 있어 보였다. 그 앞에서 오랜만에 도시를 잊을 수 있었다. 도시의 냄새를 털고 .. 2022. 1. 25. 68. 빨래를 하며 빨래를 하며 변해명 세상 바람에 시달리다 풀이 죽어 늘어선 옷을 벗어 빨래를 한다. 살아가기 힘겨워 땀에 배인 옷, 시끄러운 소리에 때 묻고 눌린 옷, 최루탄 연기에 그을고 시름에 얼룩진 옷을 빤다. 장맛비 걷히고 펼쳐지는 푸른 하늘처럼 밤마다 베개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는 악몽에 시달리는 나의 잠을 깨운다. 그 물소리처럼 지심에서 솟구치는 물꼬를 찾아 콸콸콸 넘쳐흐르는 물에 빨래를 담가 절레절레 흔들며 빨래를 하고 싶다. 여름의 한줄기 소나기는 도심을 태우던 열기를 식혀주고 악취와 쓰레기를 쓸어가며, 시원하고 깨끗한 거리를 열어준다. 그처럼 소나기를 맞으면 머리카락 올올이 빗물로 감기고, 주머니에 담긴 먼지처럼 답답한 가슴도 후련해지리라. 씹지 않고 삼킨 말의 응어리도 풀 수 있는 소나기― 빗질하는 가로.. 2022. 1. 25. 이전 1 ··· 11 12 13 14 15 16 17 ··· 3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