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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2021신춘 문예 단편소설 , 수필, 시 등 당선작137

63. 늙어가는 데 관하여 늙어가는 데 관하여 이양하 아직 하늘이 아름답고 산이 아름답고 나무가 아름답다. 아침 산책을 나서면 으레 따라 나서서 우선 죽어라 하고 언덕길을 달리는 우리 꼬마의 날씬한 몸매가 아름답고, 일찍부터 모여서 장난치는 애들이 귀엽고, 양지바른 곳에 솜병아리처럼 둘러앉아 소꼽장난하는 어린애들이 귀엽다. 학교에 오가는 길, 가다 장기를 한두 번씩 두는 늙은 영감님의 웃는 얼굴이 반갑고, 학교에서 만나 서로 안부를 묻고 집안 이야기, 학교 이야기, 세상 이야기를 주고받는 친구들이 아직 무척 반갑다. 그리고 저녁 고요한 등불 아래 자다 신경질을 부리고 하는 외에는 큰 흠이 없는 아내와 마주 앉아 책을 뒤적거리는 데도 아직 싫증이 나지 않는다. 지금은 갠 10월 아침, 조반을 먹고 책상을 대하고 앉아 있는 이 순간만.. 2022. 1. 25.
62. 눈 눈 박이문 눈.. 눈 오는 밤 혼자 불을 끄지 않고 앉아 있는 때는 인위적 시간에서 해방된 시간이고 그 공간은 물리적 제약에서 이탈된 장소이다. 그때 그리고 그 장소에서 우리들의 생각은 무한한 것과 접촉할 수 있고 무한한 우주의 맥박을 체험할 수 있다. 밭과 논, 산과 마을은 이미 눈에 덮여 온 세계를 이루고 있다. 계속 쏟아져 내리는 함박눈이 바람에 휘날려 얼굴을 적시고 눈을 가린다. 무릎까지 눈에 파묻혀가며 어느덧 어두워가는 시골의 산길 들길을 따라 아직도 아득히만 느껴지는 집으로 발길을 재촉한다. 모두가 죽은 듯한, 모두가 잠든 듯한 저녁길을 혼자서 가는데 집은 아직도 멀고 걸음걸이는 더욱 비틀거리기 시작한다. 세계는 고요하고 삶은 고독하고 엄숙하고 장엄해진다. 프로스트의 시「눈 오는 저녁 숲에 멈.. 2022. 1. 25.
61. 남녘 하늘의 비행운 남녘 하늘의 비행운 이 청 준 오후에 모처럼 바다로 낚시질을 다녀왔다. 며칠째 별려오던 망둥이 낚시질, 방마루로 나앉으면 낮은 블록 담 너머로 금세 파란 여름 들판이 내다보이고, 그 들판 끝의 방뚝 너머론 다시 하얀 바다가 떠올라 보인다. 어렸을 적 친구도 없이 부표처럼 혼자 떠돌곤 하던 바다... 한곳에 머무는 게 불편스러운 것이 이제 아예 몹쓸 체질이 된 것인가? 나는 왠지 나의 방구석 거처가 다시 불안스러워지기 시작한다. 거처를 정하고 한곳에서 내처 눌러앉아 있는 게 까닭 없이 불편하다. 하루쯤 거처를 비워두고 싶어진다. 게다가 바다는 연일 말없는 손짓으로 나를 부르고... 하여 오늘의 점심을 먹고 나서 대나무 꼭지에 나일론 줄을 흘쳐 맨 낚싯대를 만들어 메고 그 바다로 들판을 건너갔다. 여름햇볕 .. 2022. 1. 25.
60. 난과 수석 난(蘭)과 수석(水石) 박두진(朴斗鎭) 난蘭을 좋아하다가 돌을 좋아하게 되었다. 난을 그만두고 돌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난과 돌을 다같이 좋아하게 되었다. 난은 난대로 좋고 돌은 돌대로 좋아서 각각 좋아하게 된 것이지만 난을 좋아하다가 돌을 좋아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극히 자연스러운 일, 으레 그래야 할 일,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는 일로 여겨진다. 물론 꼭 그래야 하고 그럴 수밖에 없다는 법은 없겠지만 난을 좋아하다가 돌까지를, 그리고 그 난과 돌을 다같이 좋아할 수 있게 된 것은 나로서는 다시없는 청복淸福, 다시없는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난을 난대로만, 돌을 돌대로만 아는 것으로 그쳤다면 어쩔 뻔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난을 알았기 때문에 돌을 더 알 것 같고 돌을 앎으로써 난을 .. 2022. 1.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