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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2021신춘 문예 단편소설 , 수필, 시 등 당선작137

67. 복덕방 있는 거리 복덕방 있는 거리 김태길 대문을 나서면 큰 길가에 수양버들 한 그루가 비스듬히 서 있다. 수십 년의 연륜을 견디기 어려워 굵고 큰 줄기는 껍질이 벗겨지고 알맹이까지 썩어서 달아나 반쪽만 남았다. 그래도 젊은 가지 가지에는 새로운 잎이 피어서 대견한 그늘을 마련한다. 수양버드 중허리에 때 묻은 천으로 만든 약식 간판 한 장이 걸려 있다. 가로되 ‘복덕방’ 간판 아래 긴 나무때기 의자 하나 가로놓였다. 그것밖에는 아무런 비품도 없는 간이 복덕방이다. 나무때기 의자에는 할아버지 두 분이 걸터앉았다. 두 분이 다 당목 고의 적삼을 입으셨다. 한 분은 거무튀튀한 파나마 모자를 앞이 올라게게 쓰셨고, 다른 한 분은 하얀 맥고모자를 눌러쓰셨다. 파나마 모자는 긴 담뱃대를 들었고 풍덩 폼이 넓은 조끼를 입으셨다. 담뱃.. 2022. 1. 25.
66. 밤 밤 박이문 동지섣달 깊은 밤 장작을 때 따끈한 온돌방에서 등잔불 곁에 둘러앉아 엄마랑 아빠랑 콩엿, 깨엿을 깨먹던 기억을 지닌 사람은 행복하다. 안방에 갈아놓은 두꺼운 이불 위에서 잠이 들기 전에 언니랑 오빠랑 데굴데굴 구르며 깔깔거렸던 유년시절을 갖지 못한 사람은 커서도 허전할 것이다. 어릴 적 먹던 엿, 어릴 적 뒹굴던 이불, 어릴 적 서로 몸을 대고 느낄 수 있었던 가족들의 촉감은 기억만으로도 온돌방처럼 따뜻하다. 밤이 없었던들 어찌 이런 따뜻한 기억이 있을 수 있으랴. 깊은 밤 단 둘이서 속삭이는 사랑은 더욱 따뜻하다. 밤에 보호받지 못했던 연인은 사랑의 참맛을 모른다. 밤중에 이루어지는 사랑만이 진정 따뜻한 것이 될 수 있다. 칠흑같이 어둡고 고요한 밤에 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는 산 너머 초가집.. 2022. 1. 25.
65. 뒤늦게 찾아온 이 빛깔은 뒤늦게 찾아온 이 빛깔은 맹난자 겨우내 나는 조바심을 치면서 진달래꽃이 피기를 기다렸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무슨 조화 속인지 이번 봄에는 진달래꽃 빛깔의 재킷도 하나 장만했다. 그런 빛깔에 익숙하지 않아 선뜻 꺼내 입지도 못하면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봄을 지냈다. 무슨 현상일까, 뒤늦게 내게 찾아온 이 빛깔은, 피카소의 청색이 희뿌연한 어둠 속에서 서러운 포말로 발기 되는 이미지라면, 흰색은 서러운 순수, 혹은 자잘한 흰 꽃의 비애로 그리고 노랑은 강렬한 충동으로 이런 빛깔들의 이미지는 설명이 어렵지 않은데, 안타깝게도 진달래꽃 빛깔은 내밀한 어떤 이미지가 손에 잡힐 듯하면서도 그게 쉽지가 않았다. 달리는 차창 밖으로도, 공원에 들어가서도 눈은 진달래꽃을 찾기에 바빴다. 꽃 모양이 비슷해 달려가 보면.. 2022. 1. 25.
64. 더위의 우화 더위의 우화 이청준(소설가) 여름 한낮, 낮잠 속에 들려오는 벽시계 방울 치는 소리는 그대로 그냥 포탄의 폭음이다. 단 세 발의 포탄 소리에 나는 그만 낮잠을 깨고 만다. 머리를 향해 누운 뒤꼍 쪽 언덕으로 한줄기 시원스러운 바람기가 스치고 지나간다. 그 바람결에 풋나뭇잎들이 갑자기 소스라치며 서걱거리는 소리---. 그 소리가 어딘지 많이 귀에 익다. 머리를 들어 열린 문 사이로 뒤꼍을 내다본다. 언덕을 기어오르다 더위에 지쳐 축축 늘어진 호박잎들. 그 위쪽의 콩밭. 그리고 콩밭가로 늘어선 옥수숫대의 행렬-----. 바람이 옥수숫대를 스쳐가는 소리였구나. 소리의 정체는 금세 밝혀진다. 하지만 그 소리가 귀에 익은 사연은 아직도 확연치가 않다. 실제로 귀에 들리는 소리와 기억 속의 느낌이 사뭇 다르다. 그.. 2022. 1.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