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하나 꽃 피어 ―조동화(1949∼ )
나 하나 꽃 피어/풀밭이 달라지겠느냐고/말하지 말아라/네가 꽃 피고 나도 꽃 피면/
결국 풀밭이 온통/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나 하나 물들어/산이 달라지겠느냐고도/말하지 말아라/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
결국 온 산이 활활/타오르는 것 아니겠느냐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사람을 사랑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를
온 힘을 다하며 살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기쁘게 대답할 수 있도록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꾸어 가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 하겠습니다.
떠나가는 배 ― 박용철(1904∼1938)
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아늑한 이 항군들 손쉽게야 버릴 거냐
안개같이 물 어린 눈에도 비치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 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 사랑하던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
쫓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 거냐
돌아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짓는다
앞 대일 언덕인들 마련이나 있을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 야 간다
참된 친구 신달자
나의 노트에
너의 이름을 쓴다.
'참된 친구'
이것이 너의 이름이다.
이건 내가 지은 이름이지만
내가 지은 이름만은 아니다.
너를 처음 볼때
이 이름의 주인이 너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지금 나는 혼자가 아니다.
손수건 하나를 사도
'나의 것'이라 하지 않고
'우리의 것'이라 말하며 산다.
세상에 좋은 일만 있으라
너의 활짝 핀 웃음을 보게
세상엔 아름다운 일만 있으라
'참된 친구'
이것이 너의 이름이다.
넘어지는 일이 있어도
울고 싶은 일이 일어나도
마음처럼 말을 못하는
바보 마음을 알아주는
참된 친구 있으니
내 옆은 이제 허전하지 않으리
너의 깨끗한 손을 다오
너의 손에도
참된 친구라고 쓰고 싶다.
그리고 나도 참된 친구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
너의 깨끗한 손을 다오
나에게...
날개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윤옥란
매미 허물이 상수리나무 허리를 움켜잡고 있다
속이 텅 빈 껍질은 한때 어둠에서 지냈던 몸이다
땅속에서 꿈틀거리며 말랑거리던 투명한 빈 몸,
수직 금 긋고 등가죽 찢고 나왔다
말랑거리던 몸이 햇빛에 닿을 때 얼마나 따가웠을까
적들의 신호를 알려주는 은빛 날개의 보호막은 점점 두꺼워진다
비바람 몰아쳐도 떨어지거나 부서지지 않는 천상의 소리 듣는다
상수리나무 빈집에서,
지금 나는 바람도 햇빛도 들지 않는 눅눅한 지하골방에서
가시 같은 눈초리와 습한 외로움을 등에 업고 있다
낮에 두고 온 무거운 짐들은 잠시 무게를 떠났다가
귀가 열리는 순간 다시 생의 관절을 앓는다
소리를 떠난 적 없는 귀는 듣는다
영영 아물지 않는 산고의 가로줄무늬 빈집을 내려다보며
종일 여름을 등에 업고 반짝이는 소리를,
환상이 숨 쉬던 집
제 살의 온기를 묻고 나오던 집
그 집을 지나칠 때마다 내 온몸의 뼈가 뜨끔하다
어둠을 털고 나온 날개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매미의 미라는 시의 표본,
내 삶의 도감이다
홀로 걸어가는 사람 ―최동호(1948∼ )
과녁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조금 비껴가는 화살처럼
마음 한가운데를 맞추지 못하고
변두리를 지나가는 바람처럼
먼 곳을 향해 여린 씨를 날리는
작은 풀꽃의 바람 같은 마음이여
자갈이 날면 백 리를 간다지만
모래가 날리면 만 리를 간다고
그리움의 눈물 마음속으로 흘리며
느릿느릿 뒷등을 보이며 걸어가는 사람
교실 ― 정한모(1923∼1991)
초롱초롱한 눈들이 한곳으로 빛날 때
교실은 초록색 짙은 향기를 풍긴다
집중해오는 의욕의 초점에서
나의 점잔은 분해되어
꽃송이처럼 환한
하나하나의 동자 안에 자리잡는다
제각기 다른 얼굴이 된 내가
빤히 나를 쏘아보며 묻는 것이다
(…)
지난날
초록빛 짙은 향기로 가득 찼던
어느 교실의 나 같아서
밉기도 귀엽기도 한
내 과거와
이제는 내가 따라갈 수 없는 파릇한 꿈들 앞에서
나의 점잔은 다시 기침이 되어 나온다
어머니 1 정한모
어머니
지금은 피골만이신
당신의 젖가슴
그러나 내가 물고 자란 젖꼭지만은
지금도 생명의 샘꼭지처럼
소담하고 눈부십니다.
어머니
내 한 뼘 손바닥 안에도 모자라는
당신의 앞가슴
그러나 나의 손자들의 가슴 모두 합쳐도
넓고 깊으신 당신의 가슴을
따를 수 없습니다.
어머니
새다리같이 뼈만이신
당신의 두 다리
그러나 팔십 년 긴 역정(歷程)
강철의 다리로 걸어오시고
아직도 우리집 기둥으로 튼튼히 서 계십니다.
어머니!
아버지의 밥그릇 안효희
언 발, 이불 속으로 밀어 넣으면
봉분 같은 아버지 밥그릇이 쓰러졌다
늦은 밤 발씻는 아버지 곁에서
부쩍 말라가는 정강이를 보며
나는 수건을 들고 서 있었다.
아버지가 아랫목에 앉고서야 이불은 걷히고
사각종이 약을 펴듯 담요의 귀를 폈다
계란부침 한 종지 환한 밥상에서
아버지는 언제나 밥을 남겼고
우리들이 나눠먹은 그 쌀밥은 달았다.
이제 아랫목이 없는 보일러방
홑이불 밑으로 발 밀어 넣으면
아버지, 그때 쓰러진 밥그릇으로
말없이 누워 계신다
가을에 정한모
맑은 햇빛으로 반짝반짝 물들으며
가볍게 가을을 날으고 있는
나뭇잎,
그렇게 주고받는
우리들의 반짝이는 미소로도
이 커다란 세계를
넉넉히 떠받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주십시오.
흔들리는 종소리의 동그라미 속에서
엄마의 치마 곁에 무릎을 꿇고
모아 쥔 아가의
작은 손아귀 안에
당신을 찾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어제 오늘이
마침낸 전설 속에 묻혀 버리는
해저 같은 그날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달에는
은도끼로 찍어 낼
계수나무가 박혀 있다는
할머니의 말씀이
영원히 아름다운 진리임을
오늘도 믿으며 살고 싶습니다.
어렸을 적에
불같이 끓던 병석에서
한없이 밑으로만 떨어져 가던
그토록 아득하던 추락과
그 속력으로
몇 번이고 까무러쳤던
그런 공포의 기억이 진리라는
이 무서운 진리로부터
우리들의 이 소중한 꿈을
꼭 안아 지키게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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