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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내가 나의 감옥이다. (유안진)

by 자한형 2021.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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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의 감옥이다 / 유안진

한눈팔고 사는 줄은 진즉 알았지만/ 두 눈 다 팔고 살아온 줄은 까맣게 몰랐다/

언제 어디에서 한눈을 팔았는지/ 무엇에다 두 눈 다 팔아먹었는지/

나는 못 보고 타인들만 보였지/ 내 안은 안 보이고 내 바깥만 보였지//

눈 없는 나를 바라보는 남의 눈들 피하느라/ 나를 내 속으로 가두곤 했지//

가시 껍데기로 가두고도/ 떫은 속껍질에 또 갇힌 밤송이/ 마음이 바라면

피곤체질이 거절하고/

몸이 갈망하면 바늘 편견이 시큰둥해져/ 겹겹으로 가두어져 여기까지 왔어라.//

벌초, 하지 말 걸 / 유안진

떼풀 사이사이/ 패랭이 개밥풀 도깨비바늘들/ 방아깨비 풀여치 귀뚜라미 찌르레기

소리도/ 그치지 않았는데/ 살과 뼈를 녹여 키우셨을 텐데// 다 쫓아버렸구나/ 어머니 혼자

/ 적적하시겠구나//

母子 / 유안진

찬물에 기름 돌 듯/ 외로운 마음도/ 네 고사리손 잡으면/ 힘이 솟구치고// 고운때 묻은

/ 네 발바닥에/ 어미는 눈물 닦고//문밖에는 눈바람이/ 울부짖어도/ 자면서도 키룩키룩

웃는/ 아가// 우리 모자/ 꼬옥 껴안고/ 섣달 그믐 추운 밤을/ 따뜻이 가자.//

바늘에게 바치다 / 유안진

어둠에 저항하는 한 송이 작은 꽃/ 30촉 알전구 아래에서/ 바늘 귀를 더듬던 어머니//

세상으로 뚫린 유일한 숨구멍으로/ 의식주를 실어 나르던 낙타의 바늘에게//

아버지의 마음 / 유안진

휴학생의 아버지가 찾아와 하소연했다/ 씀씀이가 하도 헤퍼 용돈 적게 줬더니/ 등록금을

쓰고 휴학해버렸다고/ 돈 아까워서가 아니라/ 자식 아까워서 그랬다는데// 맞다/ 하느님

아버지도/ 내가 아까워서/ 낡은 날 더 망치게 될까 봐/ 달라는 대로 즉각 다 주시진 않는

거다//

말하지 않은 말 / 유안진

말하고 나면 그만/ 속이 텅 비어 버릴까봐/ 혼자만의 특수성이/ 보편성이 될까봐서/

숭고하고 영원할 것이/ 순간적인 단맛으로 전락 해버릴까 봐서/ 거리마다 술집마다

아우성치는 삼사류로/ 오염될까봐서/ '사랑한다' 참 뜨거운 이 한마디를/ 입에 담지 않는

거다/ 참고 참아서 씨앗으로 영글어/ 저 돌의 심장부도 속에 고이 모셔져서/ 뜨거운

말씀의 사리가 되어라고.//

지옥이 필요했다 / 유안진

결혼생활 70여 년을/ 어떻게 살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동고동락(同苦同樂)했다는/

9순의 노인 부부// 왜 동고(同苦)가 먼저냐고 묻자/ 지옥(地獄)부터 살아서/ 지금

동락(同樂)하는 천당에 올 수 있었지/ 지옥을 안 살고 어찌 천당에 왔겠냐는/ 아흐

동동다리//

감 익는 마을은 어디나 내 고향 / 유안진

섶 다리로 냇물을 건너야 했던 마을/ 산모롱이를 돌고 돌아가야 했던 동네/ 까닭없이

눈시울 먼저 붉어지게 하는/ 아잇적 큰 세상이 고향이 되고 말았다.// 사람들의 희망도

익고 익어 가느라고/ 감 따는 아이들 목소리도 옥타브가 높아가고/ 장마 끝 무너지다

남은 토담 위에 걸터앉은 몸 무거운 호박덩이/ 보름달보다 밝은 박덩이가 뒹구는 방앗간

지붕에는 빨간 고추밭/ 어느 것 하나라도 피붙이가 아닐 수 없는 것들/ 열린 채 닫힌

적 없는 사립을 들어서면/ 처마 밑에 헛기침 사이사이 놋쇠 재터리가 울고/ 안마당

가득히 말라 가는 곶감 내음새/ 달디 단 어머니의 내음새에 고향은 비로소/ 콧잔등

매워오는 아리고 쓰린 이름// 사라져가는 것은 모두가 추억이 되고/ 허물어져 가는 것은

모두가 눈물겨울 것/ 비록 풍요로움일지라도 풍성한 가을열매일지라도/ 추억처럼 슬픈 것,

슬퍼서 아름다운 것, 아름다워서 못내 그립고 그리운 것/ 그렇게 고향은 비어가면서

속절없이 슬픈 이름이 되고 있다/ 허물어져 가면서 사라져가고 있다/ 사람 떠난 빈 집을

붉게 익는 감나무 저 혼자서 지켜 섰다/ 가지마다 불 밝히고 귀 익은 발자욱소리

기다리고 섰다.//

멀리 있기 / 유안진

멀리서/ 나를 꽃이 되게 하는 이여/ 향기로 나는 다가갈 뿐입니다.// 멀리서 나를/

별이 되게 하는 이여/ 눈물 괸 눈짓으로 반짝일 뿐입니다.// 멀어서 슬프고/ 슬퍼서

흠도 티도 없는/ 사랑이여// 죽기까지 나/ 향기 높은 꽃이게 하여요// 죽어서도 나/

빛나는 별이게 하여요.//

배꼽에 손이 갈 때 / 유안진

생각할 게 있으면/ 가슴에 손을 얹는 이/ 이마를 짚거나 뒷머리를 긁는 이/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는 이/ 엉덩이를 꼬집는 이도 있다지만/ 나는 배꼽에 손이 간다// 낯선

이들하고도 아무리 가족호칭으로 불러도/ 한 가족이 될 수 없고/ 한 가족끼리도 타인처럼

사니까/ 진실은 천륜의 그루터기에서 나온다 싶어서/ 어머니와 이어졌던 흉터만 믿고

싶어서/ 출생시의 목청은 정직하니까/ 배꼽의 말은 손으로도 들리니까// 이만하면

배부르다/ 이만하면 따뜻하다/ 너무 생각 말거라/ 두 손바닥에다 거듭 일러준다/ 내 손

아닌 어머니의 손이 된다.//

四大五常, 루머가 끝나다 / 유안진

피크닉이 끝난 듯/ 다들 식당으로 들어가 잔을 기울이며 밥을 먹고/ 웃고 떠들다가

올라탄 차 안에서 단잠에 떨어졌다/ 태어나 살다 죽었다는 것이 괜한 소문일 뿐//

사랑했어도 아무도 사랑한 적 없고/ 낳아 키웠어도 자식 둔 적 없고/ 교회를

들랑거렸어도 신()을 믿어본 적 없고/ 오래 살았어도 살았던 흔적 없는/ 엊그제

죽었어도 죽은 흔적 없는/ 다만 한 토막 루머(Rumor)일 뿐// 지 화 수 풍(地火水風)

사대(四大)가 모인 사람 몸뚱이는/ 죽으면/ 피부와 살과 힘줄과 뼈는 흙으로/ 침 눈물

피는 물로/ 따뜻한 체온은 불로/ 성품은 바람으로 돌아간다는데/ 시대를 거느리던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오상(五常)/ 마음이라는데, 다들 돌아간 거기는 어디쯤인가//

입에서 입으로/ 공중에서 허공으로 잠깐 떠돌고 만/ 소음(騷音)일 따름/ 이명(耳鳴)

따름/ 엉뚱한 냇물만 오염시킨 한 움큼 먼지일 따름인가//

/ 유안진

차라리/ 내가 반쯤 죽어야/ 그대를 보는가// 철따라/ 궂은 비 뿌리는 내 울안/ 벙어리

되어 흘려 보낸/ 어두운 세월의/ 어느 매듭에서// 눈먼 혼을 불러/ 풋풋이 움 틔우며/

일월을 거느려/ 그대 오는가// 목숨과 맞바꾸는/ 엄청난 이 보배/ 차라리/ 내가/ 온채로

죽어야/ 그대를 보는가//

눈물 / 유안진

그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 뼈가 녹아 물이 되고/ 살이 녹아 물이

되고/ 살아가는 길/ 긴 여과의 과정에서// 하늘이 쪼개지고/ 땅이 울부짖는/ 날이

날마다// 사랑도/ 시도/ 그리고 학문도/ 배신을 일삼는/ 수치와 약점일 뿐// 녹아도

녹아도/ 녹지 않는 뼈와 살/ 오직 그 하나/ 나의 참뜻은// 마지막 그날에/ 생애를

걸러서/ 우러나는 한 방울// 신이 정녕 계실진대/ 무심한 하나님/ 그로 하여 나는//

몰랐다 / 유안진

히말라야 오르는 길/ 어느 외딴 高山마을 밖/ 비어있는 마을 어귀, 비어있는 길 가운데/

새끼 나귀 한 마리가 혼자 서 있었다/ 고삐 매지 않은 채로 마냥 서 있었다/ 올라갈 때

서 있더니/ 내려올 때도 서 있었다/ 행복한 눈빛으로 무작정 서 있었다/ 한참을 내려와

돌아다보니/ 도포자락 같은 흰구름을 따라가고 있었다/ 을 기다리는 줄은/ 상상도

못했다.//

충고 / 유안진

마음아/ 음지식물같이/ 창백한 내 마음아// 물에 물 탄 듯이/ 살아가는 일도/ 내게는

숨이 차다/ 벅차고 힘겨웁다.// 비가 와도 젖지 않는/ 거리 거리의 저 웃음들/ 저 바쁜

웃음 속에/ 끼여들어봐라// 웃음이든/ 노래이든/ 지저귀어봐라.//

눈 내리는 날의 일기 / 유안진

눈 내리는 창가에 서면/ 그리워집니다 다시금// 저 순수와 정직의 꽃가루/ 가득히 쓰고

달려가/ 무릎 꿇고 싶습니다.// 어느 낯선 거리에서라도/ 객쩍은 웃음으로 마주치기를//

눈 내리는 창가에 서면/ 더운 눈물 데불고 찾아오는 이/ 간절한 그 누구 아직 있습니다.

밤마다/ 박쥐떼 푸득거리는/ 추억의 동굴 속// 허깨비의 거미줄을/ 말끔히 걷어내고/

을 돋운다.// 친구여 힘을 내자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힘찬 목소리// 들창을 열고

보니/ 눈 속에 나무들 몰려와 섰다.//

이 정결한 시간에는/ 너를 생각하며/ 인적 드문 길을 걷는다.// 옷깃을 세워 입은/

뒷모습을 대한 듯// 둥구나무 높은 덩치가/ 우뚝 막아선다.//

천지가 숨죽인 겨울날에/ 쏟아지는 눈발을 지켜본다// 돌부리도/ 마른 그루터기도/

눈 속 깊이 파묻힌다// 그렇다/ 잊음도 아름다운지고// 오늘은 흰 눈 속에/ 이름 하나

묻어두자//부르면 눈발을 타고/ 와 닿을 이름아// 명년明年 새봄이 오거들랑/ 목청 풀린

시냇소리/ 촉 트는 갯버들로// 찾아오라고/ 간곡히 일러두고/ 돌아서는 지금은// 저무는

섣달/ 눈발도 굵은/ 어느 저녁답.//

눈사람 / 유안진

사람이 그리운 날엔/ 눈사람을 만들자// 꿈의 모습을/ 빚어보자// 수묵화 한 폭속에/

호젓이 세워놓고// 그윽히 바라보며/ 이 겨울을 견디리// 꿈이여 언제나/ 꿈으로만

사라져도// 못내 춥고 그리운 날엔/ 사람 하나 지어 눈 맞춤 하리라//

사리(舍利) / 유안진

가려주고/ 숨겨주던/ 이 살을 태우면// 그 이름만 남을거야/ 온몸에 옹이 맺힌/ 그대

이름만// 차마/ 소리쳐 못 불렀고/ 또 못 삭여낸// 조개살에 깊이 박힌/ 흑진주처럼//

아아 고승(高僧)/ 사리(舍利)처럼 남을거야/ 내 죽은 다음에는.//

다보탑을 줍다 / 유안진

고개 떨구고 걷다가 다보탑多寶塔을 주웠다/ 국보 20호를 줍는 횡재를 했다/ 석존釋尊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실 때/ 땅속에서 솟아나 찬탄했다는 다보탑을// 두 발 닿은

여기가 영취산 어디인가/ 어깨 치고 지나간 행인 중에 석존이 계셨는가/ 고개를 떨구면

세상은 아무데나 불국정토 되는가// 정신차려 다시 보면 빼알간 구리동전/ 꺾어진

목고개로 주저앉고 싶은 때는/ 쓸모 있는 듯 별 쓸모 없는 구리동전/ 그렇게 살았다는가

그렇게 살아가라는가.//

/ 유안진

저 쉬임 없이 구르는 윤회의 수레바퀴 잠시/ 멈춘 자리 이승에서 하 그리도 많은

어여쁨에/ 흘리어 스스로 발길 내려놓은 여자/ 그 무슨 간절한 염원 하나 있어 내 이제/

사람으로 태어났음이라// 머언 산 바윗등에 어리운 보랏빛 돌 각담을/ 기어오르는

봄 햇살 춘설을 쓰고 선 마른/ 갈대대궁 그 깃에 부는 살 떨리는 휘파람/ 얼음낀 무논에

알을 까는 개구리 실뱀의 하품/ 소리 홀로 찾아든 남녘 제비 한 마리/ 선머슴의 지게

우에 꽂혀 앉은 진달래꽃......// 처음 나는 이 많은 신비에 넋을 잃었으나/ 그럼에도

자리잡지 못하는 내 그리움의 방황/ 아지랑이야 어쩔 셈이냐 나는 아직 춥고/ 을씨년스런

움집에서 다순 손길이 기다려지니/ 속눈썹을 적시는 가랑비 주렴/ 너머 딱 한번 눈 맞춘

볼이 붉은 소년// 내 너랑 첫눈 맞아 숨박꼭질 노니는 산골 자기에는/ 뻐꾹뻐꾹 사랑

노래 자지러지고/ 잠든 가지마다 깨어나며 빠져드는 어리어리/ 어지러움증 산아래

돌부처도 덩달아 어깨춤/ 추는 시방 세상은 첫사랑 앓는 분흥 빛 봄//

1941년 경북 안동 출생.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 졸업.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학 박사. 서울대학교 생활과학대학 소비자아동학부 교수. 1965년 박목월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달하, 물로 바람으로, 날개옷, 달빛에 젖은 가락, 영원한 느낌표, 월령가 쑥대머리, 누이, 봄비 한 주머니, 숙맥 노트, 둥근 세모꼴, 걸어서 에덴까지, 알고(), 기쁜 이별, 거짓말로 참말 하기등이 있음. 목월문학상, 공초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월탄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윤동주문학상, 이형기문학상, 유심작품상, 구상문학상, 펜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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