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수필2203 30. 조선의 영웅 심 훈 우리집과 등성이 하나를 격한 야학당에서 종치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집 편으로 바람이 불어 오는 저녁에는 아이들이 떼를 지어 모여가는 소리와, 아홉 시 반이면 파해서 흩어져 가며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틀에 한 번쯤은 보던 책이나 들었던 붓을 던지고 야학당으로 가서 둘러보고 오는데 금년에는 토담으로 쌓은 것이나마 새로 지은 야학당으로 가서 둘러보고 오는데 금년에는 토담으로 쌓은 것이나마 새로 지은 야학당에서 남녀 아동들이 80명이나 들어와서 세 반에 나누어 가르친다. 물론 5리 밖에 있는 보통 학교에도 입학하지 못하는 극빈자의 자녀들인데 선생들도 또한 보교를 졸업한 정도의 청년들로, 밤에 가마니때기라도 치지 않으면 잔돈 푼 구경도 할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네들은 시간과 집.. 2022. 1. 3. 29. 7월의 바다 7월의 바다 심훈(1901~1936) 흰 구름이 벽공에다 만물상을 초 잡는 그 하늘을 우러러보아도, 맥파만경에 굼실거리는 청청한 들판을 내려다보아도 백주의 우울을 참기 어려운 어느 날 오후였다. 나는 조그만 범선 한 척을 바다 위에 띄웠다. 붉은 돛을 달고 바다 한복판까지 와서는 노도 젓지 않고 키도 잡지 않았다. 다만 바람에 맡겨 떠내려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나는 뱃전에 턱을 괴고 앉아서 부유와 같은 인생의 운명을 생각하였다. 까닭 모르고 살아가는 내 몸에도 조만간 닥쳐올 죽음의 허무를 미리다가 탄식하였다. 서녘 하늘로부터는 비를 머금은 구름이 몰려 들어온다. 그 검은 구름장은 시름없이 떨어뜨린 내 머리 위를 덮어 누르려 한다. 배는 아산만 한가운데에 떠 있는 '가치내'라는 조그만 섬에 와 닿았다... 2022. 1. 3. 28. 벚꽃 벚꽃 손소희 벚꽃 하면 일본의 국화란 생각부터 먼저 든다. 장미나 목단이나 튤립이 다 각각 저명한 나라의 국화들이라 하지만 그런 꽃에서는 우리가 이내 그 나라들을 연상하지는 않는다. 장미는 장미로서만 아름다우며, 목단은 목단으로서만 그윽하며, 연꽃은 연꽃으로서만 슬프디 슬픈 것이다. 거기엔 영국이나 중국이나 인도가 와서 걸리지는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벚꽃에만은 어찌하여 일본의 국화란 것이 추근추근히도 와서 걸리는가? 여기엔 일식의 계절 '왜정 삼십육 년'이란 우리의 피눈물 맺힌 과거(過去)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국민성이니 국책 의식이니 하는 것을 우리들의 머릿속에 주입시키기 위하여 서른여섯 해 동안 애꿎은 벚꽃에다 소위 '야마도 다마시히'를 불어넣으려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 2022. 1. 3. 27. 명정 40년 명정 40년 변영로 오 백주(白晝)에 소를 타고 역시 혜화동 우거(寓居)에서 지낼 때이었다. 어느 하룻밤 바커스(Bacchus)의 후예(後裔)들인지, 유명의 직손들인지는 몰라도 주도의 명인들인 공초, 성제, 횡보 주 삼선(三仙)이 내방하였다. 설사 주인이 불주객이란 대도 이런 경우를 당하여서는 별도리가 없었을 것은 거의 상식 문제인데, 주인이랍시고 나 역시 술마시기로는 결코 그들에게 낙후되지 않는 처지로, 그야말로 불가무(不可無) 일배주(一杯酒)이었다. 하나, 딱한 노릇은 네 사람이 주머니를 다 털어도 불과 수삼원, 그때 수삼원이면 보통 주객인 경우에는 삼, 사인이 해갈(解渴)함직하였으나 오배 사인에 한하여서는 그런 금액쯤은 유불여무(有不如無)였다. 나는 아무리 하여도 별로 시원한 책략이 없어 '궁(窮).. 2022. 1. 3. 이전 1 ··· 41 42 43 44 45 46 47 ··· 5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