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수필2203 19. 삼등석 삼등석 / 김태길 법정 출입문을 밀고 들어섰을 때 받은 첫인상은 기차 정거장 삼등 대기실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의 그것과 비슷했다. 법정 마룻바닥은 깨끗이 청소한 상태였고 비품도 그리 남루한 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등석'의 인상을 받은 것은 아마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되었으나 아직 법복을 입은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생기도 없고 풀기도 없는 사람들이 단하壇下를 가득 채우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누르께한 혈색에 표정 없는 얼굴들을 보는 순간 내 뇌리에 '삼등 인생'이라는 단어가 스쳐갔다. 변호사를 대기에는 너무나 간고하기에 자신의 권익을 스스로 변호하고자 시간에 늦을세라 부랴부랴 달려온 사람들이다. 장롱 깊숙이 아껴 두었던 외출복을 손질하여 차.. 2022. 1. 3. 18. 삼남삼녀 삼남삼녀 / 김태길(서울대 명예교수) 첫아이가 아직 태중에 있었을 때 그것은 틀림없는 아들이었다. 우선 혈통으로 보아서 아들이 분명하다. 우리 할아버지는 5남 1녀를 두셨고 아버지는 3남 1녀의 아버지요. 형님은 아들만 고스란히 삼 형제를 뽑은 전통이 있다. 그보다도 더 확실한 것은 음양의 이치이다. 수십 년간 주역 공부를 독실히 했다고 자부하는 아버지께서도 이번 낳을 새 손자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가지시고 산기가 있던 날 새벽에는 손수 여의사를 불러오셨다. 초산을 보통 산파에게 맡기기에는 염려가 되셨던 것이다. 여의사가 여아라고 선언했을 때 아무도 곧이들으려 하지 않았으나 물적 증거가 뚜렷한 이상 도리가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그 아이가 원래 섣달이 날 달인데 며칠 조산이 되어서 동짓달에 나왔으니 그럴.. 2022. 1. 3. 17. 주부송 주부송 김진섭 한말로 주부(主婦)라고는 해도, 물론 우리는 여러 가지 종류의 형태로 꾸민, 말하자면 다모다채(多貌多彩)한 여인상을 안전(眼前)에 방불시킬 수 있겠으나, 이 주부라는 말이 가진 음향으로서 우리가 곧 연상하기 쉬운 것은 무어라 해도 백설 같이 흰 행주치마를 가는 허리에 맵시도 좋게 두른 여자가 아닐까 한다. 그러한 자태의 주부가 특히 대청마루 위를 사뿐사뿐 거닌다든가, 또는 길에서도 찬거리를 사 들고 가는 것을 보게 될 때, 우리는 실로 행주치마를 입은 건전한 주부의 생활미를 한없이 찬탄하고 사랑하며 또 존경하는 바다. '먹는 자(者) 그것이 사람이다.' 하고 일찍이 갈파(喝破)한 것은 철학자 루우드비히 안드레아스 포이에르바하였다. 영양(榮養)이 인간의 정력과 품위를 결정하는 표준이 되는 사.. 2022. 1. 3. 16. 창 창 김진섭 사람은 눈이 그 창이요, 집은 그 창의 눈이다. 오직 사람과 가옥에 멈출 뿐이랴. 자세히 점검하면 모든 물체는 그 어떠한 것으로 의하여서든지 반드시 그 통로를 가지고 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우리는 그 사람의 눈에 매력을 느낌과 같이 집집의 창과 창에 한없는 고혹(蠱惑)을 느낀다. 우리를 이와 같이 견인하여 놓으려 하지 않는 창 측에 우리가 앉아 한가히 보는 것은, 그러므로 하나의 헛된 연극에 비교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우리가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너무나 많은 것-즉, 그것은 자연과 인생의 무진장한 풍일(豊溢)이다. 혹은, 경우에 의하여서는 세계 자체일 수 있는 것 같다. 창 밑에 창이 있을 뿐 아니라, 창 옆에 창이 있고, 창 위에도 창은 있어-눈은 눈을 통하여 창은 창에 의하여 이제.. 2022. 1. 2. 이전 1 ··· 44 45 46 47 48 49 50 5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