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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2203

27. 명정 40년 명정 40년 변영로 오 백주(白晝)에 소를 타고 역시 혜화동 우거(寓居)에서 지낼 때이었다. 어느 하룻밤 바커스(Bacchus)의 후예(後裔)들인지, 유명의 직손들인지는 몰라도 주도의 명인들인 공초, 성제, 횡보 주 삼선(三仙)이 내방하였다. 설사 주인이 불주객이란 대도 이런 경우를 당하여서는 별도리가 없었을 것은 거의 상식 문제인데, 주인이랍시고 나 역시 술마시기로는 결코 그들에게 낙후되지 않는 처지로, 그야말로 불가무(不可無) 일배주(一杯酒)이었다. 하나, 딱한 노릇은 네 사람이 주머니를 다 털어도 불과 수삼원, 그때 수삼원이면 보통 주객인 경우에는 삼, 사인이 해갈(解渴)함직하였으나 오배 사인에 한하여서는 그런 금액쯤은 유불여무(有不如無)였다. 나는 아무리 하여도 별로 시원한 책략이 없어 '궁(窮).. 2022. 1. 3.
26. 오비튜아리 오비튜아리 변영로 (樹 州) 사사로운 슬픔을 밖에 내이는 것은 고상치 못한 감정일 뿐만 아니라 어리석기까지도 하다. 따라서 극도의 슬픔은 밖에 내이려야 내여지지도 않는다. 깊은 물은 소리나지 않는 것처럼. 그런데 이제 나는 고상치 못하다는 말을 듣고 우치(愚痴)하다는 기소(譏笑, 남을 조롱하여 웃음)를 들으며, '깊이 느낄 줄 모르는 자'의 낙인 찍힘을 돌아보지 않고, 간 나의 아내에 대하여 몇 줄을 적어보려 한다. 이제로부터 이십삼 년 전이다. 그와 내가 결혼하던 때가. 그는 나이 열여섯이었고 나는 중학 삼년에 다니던 열네 살 적이었다. 그런데 그는 나보다 나이는 두살 밖에 위가 아니었으나 숙성한 폭으로는 오, 륙세의 차이가 있어 보였다. 동생같이 어려보이는 남편이 무엇이 그리 부끄러웠던지 결혼 후 수.. 2022. 1. 3.
25. 아내의 수술 박목월 아내의 수술날이다. 일찍 어린것들을 깨워 아침을 먹이기로 했다. 어린것들도 몹시 긴장한 얼굴이다. 어린것들 아침이나 먹여 놓고 나는 병원에 갈 예정이었다. “엄마, 오늘 수술하지?” 국민학교 2학년 꼬마와 중·고등학교 큰것들도 이상스럽게 행동이 정숙하고 옆방에 어머니가 누운 것처럼 말소리가 조용하다. 7시 벨이 울렸다. 병원에서 아내가 건 전화다. 고등학교 다니던 맏딸이 받았다. “동생들 잘 간수하라.” 는 부탁이다. 그리고는 남규, 문규, 신규 한 사람씩 전화 앞에 불러내어 그들 하나하나에 당부를 한다. 가슴이 선뜩하다. 수술하기 전에 자기로서는 비장한 결심을 하고, 아이들의 음성을 들으려는 뜻이다. “당신예요? 곧 와요. 벌써 몽혼 주사를 놨어요. 여덟시 반에 수술실로 들어간대요.” 비장한 목.. 2022. 1. 3.
24. 어린이 예찬 어린이 예찬 방정환 어린이가 잠을 잔다. 내 무릎 위에 편안히 누워서 낮잠을 달게 자고 있다. 볕 좋은 조용한 오후다. 고요하다는 고요한 것을 모두 모아서 그중 고요한 것만을 골라 가 진 것이 어린이의 자는 얼굴이다. 평화라는 평화 중에 그중 훌륭한 평화만을 골라 가진 것이 어린이의 자는 얼굴이다. 아니 그래도 나는 이 고요히 자는 얼굴을 잘 말 하지 못하였다. 이 세상의 고요하다는 고요한 것은 모두 이 얼굴에서 우러나는 것 같고, 이 세상의 평화라는 평화는 모두 이 얼굴에서 우러나는 듯싶게 어린이의 잠자는 얼굴은 고요하고 평화롭다. 고운 나비의 나래, 비단결 같은 꽃잎, 아니 이 세상에 곱고 보드랍다는 아무 것으 로도 형용할 수없이 보드랍고 고운 이 자는 얼굴을 들여다보라. 그 서늘한 두 눈을 가볍게 .. 2022. 1.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