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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4137

문신 문신 / 박종희 ​ 마지막으로 어머니 얼굴을 보는 날이다. 입관실에 누워 계신 어머니는 잠에 취한 듯 미동도 없다. 눈만 감았지 산사람과 다르지 않은 어머니의 야윈 민낯이 창백하다. 이 시간이 지나면 영영 볼 수 없음에 오열하는 형제들의 눈물이 어머니의 차가운 얼굴에 뚝뚝 떨어진다. 어머니를 붙잡고 매달리는 자식들의 눈을 돌리려는 듯 장례지도사의 손이 민첩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탈지면에 알코올을 묻혀 정성스럽게 얼굴을 닦아내던 그의 손끝이 눈썹 주변에서 잠시 주춤하더니 유독 세심하게 닦아낸다. 두세 차례 닦아낸 어머니의 하얀 얼굴에는 그려놓은 듯한 청회색 눈썹이 그대로 남아있다. 아주 오래전에 동네 아주머니들과 같이 새긴 눈썹 문신이다. 사람이 죽어도 문신은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어머니는 아셨을까. .. 2022. 7. 31.
밀삐 밀삐 –김장배 지게를 멘 토우가 뚜벅뚜벅 걸어온다. 등 뒤엔 커다란 항아리가 얹혀 있다. 둥글게 흘러내리는 얼굴엔 슬쩍 엷은 미소가 번진다. 팔을 뻗고 무릎을 약간 굽힌 채 힘차게 걷는 모습이 이제 막 집으로 돌아오는 아버지 같다. 용강동 고분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 토우 중 ‘지게를 진 인물상’이다. ​지게를 등에 지고 다닐 수 있도록 하는 어깨끈이 밀삐다. 평형수가 선박의 균형을 유지하듯 지게가 흔들리지 않게 잡아주고 무게를 지탱해주는 역할을 한다. 잘려 나간 토우의 왼쪽 팔은 필시 밀삐를 단단히 움켜쥐었으리라. 시골의 삶은 다들 척박했다. 논밭이 적었고 그마저 땅 힘이 약해 많은 사람이 풀뿌리죽으로 끼니를 때웠다. 더벅머리 같은 초가지붕 아래 아이들은 왜 그리 줄줄이 많은지. 뉘 집 할 것 없이 굶.. 2022. 7. 31.
발해를 꿈꾸며 발해를 꿈꾸며 - 정영태 우리는 매 순간 꿈을 향해 나간다. 꿈이 없는 사람은 삶의 의미도 반감되기 마련이다.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꿈을 꾸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발해가 멸망한 지 천년이란 세월이 훌쩍 지났음에도 그 옛날 영광을 되찾으려는 사람이다. 그들이 모여 사는 경상북도 경산시 발해 마을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 그들은 어디서 온 누구일까. 발해를 건국한 사람은 고구려 후예들이다. 고구려가 신라에 나라를 넘겨준 후 그들은 두만강을 건너 요동 땅으로 가서 발해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696년 건국해 230여 년을 부국강병 국가로 성장했다. 바다 동쪽의 번창한 나라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리며 부유하게 살던 발해가 어느 날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멸망한 계기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권.. 2022. 7. 31.
아비 그리울 때 보라, 한만년의 일업일생 아비 그리울 때 보라, 한만년의 일업일생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출판인 구봉(久峰) 한만년(韓萬年, 1925 ~2004) 선생을 대한민국 출판계의 큰 어른이었다고 말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른’이란 말이 가지는 권위에 대해 요즘 시각으로 보면 섣부르게 ‘꼰대’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당신은 정말 큰 어른이었다. 그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9월14일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41번지에 도서출판 일조각(一潮閣)을 설립한다. ‘일조각’이란 이름은 한만년 선생의 장인 유진오(兪鎭午) 박사가 장차 출판사를 운영할 생각으로 미리 지어놓은 이름이었다. 일조각은 창업 이래 현재까지 한국학 관계 도서 1500여 종을 비롯해 역사학·사회학·법학·의학·경제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2500여 .. 2022. 7.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