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수필4137 해인의 달 海印의 달 / 장 기 오 한 여자가 울고 있었다. 냉기가 뼛골까지 스며드는 대웅전 바닥에 엎드려 여자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울고 있었다. 무슨 사연일까. 속세의 근심이 얼마나 깊었으면 눈 오는 이 겨울날, 차가운 바닥에 얼굴을 대고 저리도 울고 있을까? 남한산성 입구에 자리 잡은 이 절은 평소 사람의 왕래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오늘따라 적막강산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풍경 소리만 청명하다. 선방 앞에 나란히 놓인 흰 고무신이 스님의 고행을 말해준다. 스님은 이 적막한 아침에 무슨 화두를 안고 고뇌하고 있을까. 저 중생의 아픔을 아시는가. 지난겨울 눈이 많이 왔다. 하루건너 한 번씩 내렸다. 도로가 끊어지고 시골 비닐하우스가 무너졌다. 영동산간은 고립되었고 산짐승들의 먹이를 헬리콥터로 공급해 주어야 했다. 창.. 2022. 8. 13. 문학을 위하여 문학을 위하여 -고종석 식물성의 저항 '문학의 죽음'은 이제 상투어가 되었다. 그것은 지난 세기 중엽에 서유럽에서 처음 발설된 뒤, 그럴싸한 이론들의 뒷받침을 받으며 한담 설화의 흔하디흔한 소재가 되었다. 그러나 문학의 죽음이 바야흐로 임박했다는 구체적 징후는 새로운 세기의 초에도 보이지 않는다. 아마 21세기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문학은 살아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문학은 지난 세기까지의 문학과는 생김새와 놓여 있는 자리가 많이 달라질 것이다. 동양에서든 서양에서든, '문학'이라는 말은 '문자'라는 말과 어원적으로 깊게 얽혀 있다. 그것은 문학이 무엇보다도 '기록된 것'이라는 관념을 반영하고 강화해 왔다. 이런 관념에 기대어 문학의 역사와 문자의 역사를 나란히 줄세운다면, 문학의 역사는 5천5백 .. 2022. 8. 13. 그대 그리운 이여 그대 그리운 이여/최 명 희 나는 봄의 밤 강물을 보았다. 달도 없는 야청 하늘의 검푸른 등허리에 몇 점 별빛,새로 돋는 풀잎 뿌리 여린芽(아)처럼 눈 뜬 밤.물오른 어둠을 깊숙이 빨아들여 숙묵(宿墨)보다 더 검어진 산 능선이 반공에 뚜렷한 마루를 긋고 있는데,그 산 그림자 품어 안은 밤 강물이 소리 죽여 제 몸의 비늘을 풀며,아득히 가득히 흐르는 것을 나는 보았다.그것은 돌아오는 강물이었다. 언제라고 강물이 한자리에 서 있으랴만,가을의 강물은 뒷모습을 차갑게 가라앉히며 멀리 떠나가는 강물이요,겨울 강물은 쓸쓸히 남은 그 물의 살을 벗고,오직 뼈만으로 허옇게 얼어붙어 극한(極寒)속에서 존재의 막투름을 견디는 얼음이다. 지난여름 무성하게 푸르러 눈부시게 젊고도 풍요로운 강물이 제 온몸을 수천수만,수십만 개.. 2022. 8. 13. 청산에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 김 진 식 내 앞에 손님이 한 분 나타났다. 속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깨끗하면서도 기품이 있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익은 얼굴이었지만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귀한 분이 찾아 왔구나’ 하고 서재로 안내했다. 그는 내게 가벼운 묵념을 하고 자기소개를 했다. 청산 백운동에서 띳집을 짓고 사는 모생(茅生)이라면서 연분이 있어 거사를 찾아왔다는 것이다. 청산 백운동이 어디 있느냐고 내가 물었을 때 그는 학 같은 몸짓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창밖에는 푸른 산이 솟아 있고, 흰 구름이 산허리를 감고 있었다. 이럴 수가 있나 하고 그의 손을 잡으려 했을 때 정신이 들었다. 그것은 꿈이었다.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정암사 가는 길에 일박한 허름한 여인숙에서였다. 무엇인가 예지하는 꿈인 것 .. 2022. 8. 13. 이전 1 ··· 5 6 7 8 9 10 11 ··· 3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