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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4137

우체부 우체부 -최명희 그의 모습은 어느 곳에서도 낯설지 않다. 플라타너스가 한들거리는 신작로, 산모퉁이를 도는 오솔길, 고층 건물이 어지럽고 자동차 소음이 날카로운 대도시의 도로, 내게 편지라고는 올 리 없는 먼 거리에서도 그는 반갑다. 우체부를 만나면 그가 특이한 음성으로 내 이름을 부르며 편지를 내줄 것만 같은 기대로 마음이 차오르곤 한다. 그의 음성은 항상 즐거운 긴장을 준다. 내게는 편지 보낼 곳도 편지 올 곳도 별로 없으면서 그의 음성이 먼 곳에서부터 들리면 공연히 가슴을 조인다. 더욱더 볕발이 투명한 가을의 오후에 울타리 넘어오는 그의 소리는 유난히 귀를 기울이게 해준다. 가까워지던 목소리가 나를 부르지 않고 그냥 지나칠 때는 그만 가슴이 텅 비어 버리고 뒤쳐나가 그의 가방을 뒤져보고 싶은 충동을 .. 2022. 8. 13.
비탈에 서 있는 나무 비탈에 서 있는 나무 -서양호 8월이라 녹음이 절정이다. 수목들은 초록이 짙어져 검푸른 모습이 되었다. 올여름에는 장마가 수십 년 만의 기록을 세우며 장기간으로 길어진 데다 태풍마저 더해져서 비가 줄기차게 내렸다. 계곡의 수량도 엄청나게 불어나 흐르는 물소리가 산을 울리고 있다. 장대비가 퍼붓듯이 내려 제방을 무너트리며 물난리를 일으키고 여러 곳에서 산사태가 발생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산사태 발생 지역은 인공의 손길이 미친 곳이 대부분이라 했다. 인간의 무모함과 지혜롭지 못한 욕심이 자연의 뜻을 그슬린 듯해서 안타까움이 앞선다. 폭우로 인한 자연재해를 보면 인간의 능력도 자연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절감하게 된다. 비탈이란 산이나 언덕이 비스듬히 기울어진 부분을 일컫는다. 주말마다 가는 등.. 2022. 8. 13.
졸참나무 졸참나무-엄옥례 누가 치맛자락이라도 당긴 걸까. 집에서 일터로만 쳇바퀴를 돌리던 발길이 무슨 심사인지 뒷산으로 향했다. 칼바람이 물러간 자리에 봄바람이 스며들고 동면에서 깨어난 나무는 분주히 수액을 빨아올리고 있었다. 그 기운을 마시며 잠시 쉬는 산허리, 뿌리를 드러낸 채 쓰러진 나무둥치에서 가지 하나가 연둣빛 새순을 빠끔 내밀고 있었다. 지난여름에 쓰러진 졸참나무다. 등산로를 넓히느라 뿌리가 드러나 태풍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우람하지는 않아도 제법 실팍하고 도토리까지 조롱조롱 달고 있어, 고만고만한 삶을 위안 받으러 가끔 산을 오를 때면 가난한 마음을 채워주던 나무다. 만져도 보고 흔들어도 보고, 한동안 눈을 뗄 수 없었다. 세파에 쓰러져 번성했던 가지도 다 버리고 희망 한 줄기를 살리려는 남편이 보.. 2022. 8. 2.
피아노야 피아노야 –김잠복 피아노를 친다. 전날보다 손놀림이 훨씬 좋아졌다는 선생님 칭찬에 자신감이 생긴다. 하얀 건반 위의 다섯 손가락이 오늘따라 더 예쁘다. 그러나 며칠 내로 마련해야 할 회비를 생각하면 몸은 바위무게로 내려앉고 손이 오그라들었다. ​여고 시절, 짝꿍 애선이는 피아노를 잘도 쳤다. 음악 시간이면 반 친구들 앞에서 보란 듯이 피아노를 쳤다. 선생님 대신 왜 그가 피아노를 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다가 음악 시간을 끝냈다. 입이 노래 삼매경에 빠질 때도 눈은 처음부터 끝까지 건반 위에서 은구슬을 굴리듯 튕기는 애선이 손가락만 지켰다. ​나도 피아노를 잘 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시절 피아노는 부잣집 자식한테나 가능했다. 약국집 맏딸이던 애선이에 비하면 촌뜨기.. 2022. 7.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