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수필4137 잊혀진 왕국 잊혀진 왕국 -서영윤 역사는 침묵 속에 살아 숨을 쉰다. 겹겹이 둘러싸인 산허리를 돌아서면 산수화 같은 마을이 펼쳐진다. 비슬산 자락에 물이 달을 품는 수월리(水月里)다. 깊디깊은 산골이라 실개천만 있을 뿐 작은 물웅덩이 하나 없어 도저히 달이 내려앉을 수 없는 촌락이었다. 마을 이름을 천 년을 내다보고 지었을까. 긴긴 세월 동안 조용하고 고요했던 이곳에 댐이 들어섰다. 댐이 가두어 놓은 물 위로 달이 내려앉았다. 비로소 수월리는 제 이름을 찾았다. 물과 달은 혼자 오지 않았다. 댐을 건설할 때 무려 삼천육백여 점의 유물이 땅 깊은 곳에서 기지개를 펴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유물은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 시대의 것도 아니요. 선사 시대의 것도 아니었다. 이서국(伊西國)이 남긴 자취였다. 낯선 이름 그 .. 2022. 7. 17. 유쾌한 오해 유쾌한 오해 -박완서 전동차 속에서였다. 아직도 한낮엔 무더위가 많이 남아있었지만 3호선 전동차 안은 쾌적할 만큼 서늘했고 승객도 과히 붐비지가 않았다. 기술의 발달 때문인지, 경제성장 때문인지는 몰라도 1호선보다는 2호선이 더 쾌적하고 2호선보다는 3,4호선이 더 쾌적한 걸 피부로 느낄 수가 있었다. 나는 늘 2호선을 이용하기 때문에 약간은 샘도 났다. 내 옆자리가 비자 그 앞에 서있던 청년을 밀치고 뚱뚱한 중년 남자가 잽싸게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넉넉하던 자리가 꽉 차면서 내 치맛자락이 그 밑에 깔렸다. 약간 멋을 부리고 나간 날이라 나도 눈살을 찌푸리면서 치맛자락을 끌어내려고 했지만 그는 꼼짝도 안 했다. 여간 무신경한 남자가 아니었다. 나는 별 수 없어 그 남자를 툭툭 치면서 내 치맛자락이 그의 .. 2022. 7. 17. 생각의 모래알을 줍다 생각의 모래알을 줍다 / 곽 흥 렬 해운대 앞바다를 거닐고 있다. 가물가물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백사장, 눈이 부시게 반짝이는 금빛 모래가 파아란 바닷물 색과 어우러져 좋은 대비를 이룬다. 대체 이 하고많은 모래 알갱이들이 언제 어디서 어떤 사연으로 이곳까지 실려 오게 된 것일까. 아마도 여기 모래들의 먼 조상은 본시 어느 깊고 깊은 산골짜기의 집채만 한 바윗덩이였으리라. 허구한 나날들을 부산을 떨면서 서로 부딪치고 떠다밀고 섞갈리는 기나긴 여정 끝에 마침내 실향민이 되어 이곳에 몸을 뉘고 있는 것이리라. 어느 미지의 세계를 꿈꾸고 있기에 자신이 정붙이고 살던 심산계곡을 버려두고 이렇게 타관살이의 아픔을 겪어야 하는 걸까. 이 모래들을 보면서 청운의 뜻을 가슴에 품고 고향을 등진 채 무작정 대처로, 대.. 2022. 7. 17. 나는 콩나물이다. 나는 콩나물이다. -김희정 거울을 본다. "꽃도 풀도 아니군. 나는 콩나물이다. 축축한 곳에 산다. 머리카락도 자라지 않는 깊은 어둠 속이다. 오늘도 난 수많은 골목이 있는 생각의 마을을 지나 긴 터널을 달려 마음이 보이는 가까운 내륙의 섬을 여행한다. 시간이 기웃거리며 도착하고 싶은 장소가 있다. 사치스러운 꿈이 피어나던 꽃밭을 찾아, 아직 앉지 못하고 샛길을 서성인다. 젖은 보자기 밑에서 햇빛을 향해 바글거리며 숨 쉬던 콩나물이 사는 불 꺼진 동네가 보인다. 어둠 안쪽에서 창백한 얼굴을 내밀고 섰던 깡마른 존재 하나. 다리를 뻗고 눕고 싶던 콩나물 줄기의 욕망일지 모른다. 사람의 손길이 그리운 거기." 얼굴에 검은 보자기를 쓰고 시루 밑바닥에서 총총거리며 뿌리털이 자라고 있는 콩나물의 자화상이다... 2022. 7. 17. 이전 1 ··· 10 11 12 13 14 15 16 ··· 3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