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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4137

25. 불협화음 불협화음/ 노정숙 가슴이 두근거린다. 얼굴이 하얀 의사는 살짝 미소까지 띄며 말한다. 지금 내 심장의 상태는 빈혈이 심해서 내가 편히 누워있을 때도 100미터 달리기 중이라고 한다. 내 혀가 달큼한 유혹에 노닐고 내 눈이 깜빡 즐거움에 빠진 시각에도 심장은 저 홀로 숨이 가빴던 것을 왜 알아채지 못 했는지. 막연히 불안했던 게 그것이었단 말인가. 당장 아침저녁 밥상에서 작은 당의정 한 알을 삼켜야 한다. 느닷없는 하혈도 대수롭지 않게 시침 떼고, 주변이 자주 흔들리는 것도 묵살했건만 건강에 있어 과신하는 내 오만이 한계에 다다랐나 보다. 빈혈약을 먹는 것은 임시방편이고 빈혈의 원인을 찾아야 했다. 몇 가지 검사 후에 어렵지 않게 산부인과에서 원인을 찾았다. 보이지 않는 속은 보고 싶지 않았지만 의사는 친.. 2022. 2. 2.
24. 봄은 희다 봄은 희(囍)다/ 유병근 봄을 찾아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은 환한 꽃을 닮았다. 겨우내 딴딴하게 얼어붙었던 땅을 뚫고 치솟는 식물처럼 사람들은 날이 풀리자 밖으로 나가는 걸음이 잦다. 팽팽하게 공중에 치솟아 있던 헐벗은 나뭇가지도 파르스름한 잎눈과 꽃눈을 몸에 치장한다. 사람의 몸에도 옷치장이 가벼워진다. 며칠 전의 칙칙한 코트를 벗어놓고 망사같은 옷으로 몸을 가꾼다. 옷이 무거운 계절이 겨울이라면 봄은 그것을 한 겹 한 겹 벗는 계절이다. 성급하게 벗다가 낭패를 당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굳이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봄은 베란다 안에도 베란다 밖에도 있다. 멀리 보이는 산이 차차 파르스름한 기운을 드러내며 가까이 온다. 며칠 전에 본 아파트 입구의 모과나무는 봄이 오는 달력이나 다름없었다. 하루하루가 다.. 2022. 2. 2.
23. 봄에게 봄에게 김애자 봄! 그대는 알고 있는가? 그대 이름을 부를 때면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살짝 맞물린다는 것을! 아니 입술이 꽃봉오리처럼 봉싯 모아지기도 하겠다. 그대 이름에선 향기가 난다. 형제도 없으면서 그대가 보이지 않던 것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마른가지에서도 움이 돋고, 여기저기서 꽃들이 피어난다. 그것도 눈부시도록 찬란하게. 봄볕이 아른거리는 꽃밭에 엎드려 양 볼을 크게 부풀리고 훅, 입김을 내뱉으면 여린 풀잎이 파르르 떨린다. 나이가 들었지만 지금도 나는 이 놀이를 즐긴다. 비릿하면서도 달짝지근한 생명의 숨결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아라 생명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를? 이건 분명 무형이 낳은 유형의 변주라 하겠다. 아름다운 형체의 변주, 생명의 변주(變奏)라 하.. 2022. 2. 2.
22. 바람의 집 바람의 집/ 심선경 어렸을 때, 세상의 모든 바람은 대나무 숲에서 생겨나온 것이라 믿었다. 씨름선수의 팔뚝보다 굵은 왕대나무가 긴 창을 치켜든 장군의 기개처럼 하늘을 찌를 듯했고 그 대숲에 숨어살던 바람이 저 혼자 심심해져서 슬그머니 세상 구경을 나오는 것이라 생각했다. 할머니를 따라 큰 절에 가면 뒤 안에는 울타리 같은 대숲이 있었다. 궂은 날이 아니더라도 대숲에는 늘 소소한 바람이 일었다. 너무 조용할 땐 강물이 가을바람에 뒤척이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하였다. 바람이 잦아지면 댓잎들끼리 사그락대며 몸을 비비다가 한쪽으로 몰리면서 물살이 밀려왔다 조약돌 사이를 빠져나갈 때 들리는 소리를 내기도 했다. 이름 모를 새들이 대숲에 깃들어 살다 발걸음 소리에 놀라 숲 여기저기서 잽싸게 날아올라 하늘 저편으로 사.. 2022. 2.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