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현대수필4137

37. 어린 부처님 어린 부처님/ 송규호 오늘은 5월 5일 어린이 날이다. 변산반도 내소사의 숲속 놀이터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린이를 위한 나들이가 아니라 부녀자들의 흥겨운 봄놀이인 것이다. 내소사에서 계곡을 따라 올라간다. 가인봉의 중턱 높다란 곳에 자리한 청련암에의 길이 생각보다 순탄하지 않다. 암자에서 바라보는 전망이 일품이다. 병풍처럼 둘러선 바위산으로 에워싸인 골짜기는 서쪽만이 뚫려서 멀리 펼쳐진 서해 바다다. 그런데 텅 비어 있는 암자의 방문에는 자물쇠가 잠겼다. 그리고 꽃 한 송이 피어낼 구석도 없는 좁디좁은 텃밭에 상추만이 너붓너붓 자라고 있다. 아무도 오지 않는 암자에 배낭을 맡겨두고 산마루를 향해 오른다. 저 봉우리와 이 능선을 오르내리다가 되돌아와도 암자는 여전히 쓸쓸하기만 하다. 평.. 2022. 2. 9.
36. 어떤 사진 어떤 사진/ 류경희 시어머님께서 쓰시는 안방에는 이색적인 인물사진 둘이 나란히 걸려 있다. 집안 사정을 잘 모르는 이들은 어떤 마음으로 바라볼까 하는 생각을 사진을 대할 때마다 하게 된다. 사실 사진 하나하나를 떼어놓고 보면 전혀 이상할 것도 없는 평범한 인물사진이다. 창쪽 가까운 벽에 자리하고 있는 액자는 40여 년 전 유명을 달리하신 시아버님의 모습을 흑백으로 담아 놓은 것이다. 필름의 원판을 확대한 것이 아니라 오래된 앨범 속에 붙어 있던, 빛이 많이 바랜 사진을 확대한 것이어서 아버님의 모습은 선명치가 않다. 비스듬히 포즈를 취한 아버님은 내 남편의 지금 나이보다도 10여 년은 젊어 보이는 풋풋한 모습이다. 아버님은 이 사진을 찍으시려고 퍽 신경을 쓰신 것 같다. 머리카락은 잘 손질되어 말끔하게 .. 2022. 2. 9.
35. 아버지의 방 아버지의 방/류창희 아버지의 방이 없다. 방이 있었는지조차 모른다. 열 수 있는 문고리와 외풍을 막는 문풍지가 있었는지 아랫목은 따뜻했었는지 알 수가 없다. 어느 수필가는 아버지의 서재에 꽂혀 있는 책을 보며 자랐다는 표현을 했다. Y선생은 딸과 사위가 우산을 받들고 나란히 집으로 오는 모습을 마음의 벽에 걸었고, J씨는 대학시험에 떨어지던 날 ‘어이구 가시나야’ 하며 돼지고기 반 근을 사 오신 아버지의 사랑을 온전한 한 근으로 마무리했다. 시를 쓰는 J선생은 화가라는 호칭으로 전시회도 여는데, 미술을 하고 싶어 방황하던 여고시절 완고한 아버지가 자신을 방에다 가둬놓고 감시를 했었다고 한다. 이렇게 가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혹은 아버지 사랑에 대한 글을 읽을 때, 나는 참으로 생소하다. 아.. 2022. 2. 9.
34. 아름다운 소리들 아름다운 소리들/ 손광성 소리에도 계절이 있다. 어떤 소리는 제 철이 아니면 제 맛이 나지 않는다. 또 어떤 소리는 가까운 곳에서 들어야 하고 다른 소리는 멀리서 들어야 한다. 어떤 베일 같은 것을 사이에 두고 간접적으로 들어야 좋은 소리도 있다. 그리고 오래 전에 우리의 곁을 떠난 친구와도 같이 그립고 아쉬운 그런 소리도 있다. 폭죽과 폭포와 천둥소리는 여름에 들어야 제격이다. 폭염의 기승을 꺾을 수 있는 소리란 그리 많지 않다. 지축을 흔드는 이 태고의 음향과 ‘확’ 하고 끼얹는 화약 냄새만이 무기력해진 우리들의 심신에 자극을 더한다. 뻐꾸기며 꾀꼬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폭염 아래서는 새들도 침묵한다. 매미만이 질세라 태양의 횡포와 맞서는데, 파도처럼 밀려오는 그 힘찬 기세에 폭염도 잠시 저만치 .. 2022. 2.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