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수필4137 29. 쉰 쉰 -엄현옥 이럴 줄 몰랐다.십진법으로 묶인 나이 숫자가 바뀌면 어디선가 사전 통보라도 해올 줄 알았다.생각해 보니 사십에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자고 일어나 보니 유명해졌다는 어느 문사는 이름이라도 남겼다.어영부영 하다 보니 쉰이란다.죽어서도 천 년을 간다는 태백의 주목(朱木)이 보면 한없이 좋은 나이다.그렇게 말하는 이는 좋은 세월 다 갔다는 말을 괄호 안에 써놓았으리라. 아무려면 어떠랴 이미 쉰인 걸….마흔일 때도‘불혹(不惑)’영역에서 제대로 된 등급을 받지 못했다.재수(再修)라고 했다면 좋았으련만 생략했다.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건너 뛰어,지천명(知天命)반(班)에 편입해 버렸다.턱없이 모자란 실력으로 월반한 학생이 학교생활처럼 세상은 만만한 것이 없다.마냥 봄날도 아니다. 그럴 줄 알았다.지천.. 2022. 2. 6. 28. 세월은 강물처럼 세월은 강물처럼 김가영 꽤 오래 전의 일이지만 길 저쪽에서 걸어오는 남자들의 시선이 내게 멈추지 않을 때의 충격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놀랄 만큼의 미인도 스타일도 좋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 같은 여자도 열 사람 중 여섯 정도는 잠시 시선을 멈추었다. 오직 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여자들이 그런 것처럼 남자들이 봐주고 보여지면서 조금씩 나이가 들어가는 것이다. 한국 남자들은 특히 젊고 예쁜 여자에게밖에 시선을 주지 않는다. 이미 예쁘지도 귀엽지도 않은 여자는 다른 것으로 남자들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내가 글을 쓰기 시작했다면 반은 진짜고 반은 거짓말이다. 아무튼 그 충격과 분노의 날로부터 십여 년이 지났다. 그리고 최근에 노년기에 접어들면서 다시 .. 2022. 2. 2. 27. 서나 가든의 촛불 서나 가든의 촛불/ 유숙자 하루가 저물며 서서히 땅거미가 내릴 때쯤이면 버릇처럼 집을 나선다.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시간, 사물이 희미하게 실루엣만 보이는 이 저물녘의 산책을 나는 좋아한다. 전에는 주로 아침 시간에 걸었으나 언제인가 노을의 황홀경에 취한 후부터 해질무렵이면 누군가 나를 부르는 것 같은 충동이 인다. 진줏빛 분홍과 선홍색의 노을이 함께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차츰 검붉은 잔영을 남기며 스러져가는 빛의 그림자 속에 빠져 듦도 좋다. 어스름이 안개처럼 퍼지기 시작하면 별이 하나씩 눈을 뜨듯이 여기저기 주택가에서 빛이 살아난다. 세월 저편, 어느 창가에서 보았던 감동의 불빛이 그리움 되어 어른거리는 것도 이 저물녘이다. 우리 가족이 영국에서 살 때이다. 처음 자리한 곳이 ‘선버리 언 템즈’(S.. 2022. 2. 2. 26. 빨강 신호등 빨강 신호등 김애양 운전을 하다보면 유난히 놀랄 일이 많다. 깜박이도 켜지 않고 끼어드는 차, 골목에서 예고 없이 뛰쳐나오는 사람, 심지어는 천진난만하게 뛰어드는 꼬마 때문에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혼비백산을 하곤 한다. 그렇게까지 돌발 상황은 아니라도 제동을 걸어야 할 때가 흔하다. 그 중에서 차간간격을 넓게 놔둔 채 더디 가는 차의 꽁무니를 뒤따르려면 갑갑하기 짝이 없다. 그나마 ‘초보운전’ 표지를 붙인 차는 귀엽기라도 하지만 핸드폰을 든 채 한 손으로 운전을 하거나 조수석에 앉은 연인과 호호거리는 차 뒤에선 나의 급한 성정이 드러나면서 험한 말이 튀어나오곤 한다. 그럴 때마다 혼자 다짐한 바가 있다. ‘누군가에게 브레이크를 밟게 만들지 말자.’ 그건 흐름에 맞춰 운전을 하잔 것과 주행 중엔 운전에만 집.. 2022. 2. 2. 이전 1 ··· 25 26 27 28 29 30 31 ··· 3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