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수필4137 21.무언 무언(無言)/ 박종숙 아버지는 지금도 내 가슴에 커다란 거목으로 살아 계신다. 동네 입구를 돌아서면 떡 버티고 서서 마을을 지켜주던 믿음직스런 느티나무처럼 나를 지켜주는 절대자이시다. 비록 이 세상에 살아 계시지는 않다 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항상 나를 보호하고 계신 수호신이다. 남아있는 세월에 대해 미련을 갖지 않으셨던 아버지는 세상을 하직하면서도 많은 말을 아끼고 가셨다. 그 무언이 더 많은 말을 내포하고 있다는 걸 철없던 나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도 꿈결에 나타나 말없이 바람막이로 서 계신 아버지를 뵐 때면 안타까운 심정이 된다. 당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딸을 몰라보는 것은 아닌가 하여. 아버지는 췌장암으로 고생하시다 돌아가셨다. 임종을 앞둔 한 달 전부터 잘 잡숫던 음식도 제대로 들지 못.. 2022. 2. 1. 20. 무리지어 피는 꽃 무리지어 피는 꽃/ 박장원 메밀밭. 강원도 이름 모를 한 산등성이를 넘으며 솜사탕을 깔아 놓은 것 같은 그 들판을 보고서 넋을 잃고 말았다. 황혼녘 그 꽃벌판은 신기루처럼 느닷없이 나타났다. 메밀꽃은 무심히 지나치는 젊은 군인의 땀에 전 푸른 제복을 어루만지며, 초가을의 기우는 햇살을 받아 도도히 흐르는 듯하여 그 감흥이 지금까지도 잔잔하게 일렁이고 있다. 달빛 아래의 그 꽃을 효석이 그냥 지나칠 리 없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은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기경이다.” 그는 「메밀꽃 필 무렵」에서 그 감동을 흩뿌렸지만, 나는 무리지어 피었던 아름다운 그 꽃처럼 살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무리지어 피는 꽃들. 어린 기억에도 잊지 못할 생생한 꽃들. 4월부터 백색 또는 .. 2022. 2. 1. 19. 모기 사냥 모기 사냥/ 신길우 세수를 하고 나오니 동생이 거실에서 파리채를 들고 천장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다. “웬 파리채냐? 파리가 어딨다고.” 동생은 여전히 두리번거리면서 대꾸한다. “파리는요? 모기 때문이지.” 안방으로 들어가니 거기서는 매제가 신문지를 말아 쥔 채 역시 모기를 쫓고 있다. 그러고 보니, 아침신문 위에는 죽은 모기 여러 마리가 놓여 있다. 두어 마리는 배가 터져 붉은 핏기를 보이고 있지만 대부분의 것은 배가 홀쭉하다. 아마 추석명절의 차가운 초가을 날씨 때문에 힘을 쓰지 못하여 피를 빨아먹지도 못한 채 잡히고 만 것 같다. “집안에 모기를 기르나봐. 모기 때문에 한숨도 못 잤어요.” 매제의 실없는 소리에 응원이나 하듯 여동생이 안방으로 들어오며 한 마디 던진다. 그리고는 모기에 물려서 분 팔.. 2022. 2. 1. 18. 면사포 면사포/ 김우종 90넘은 누님이 80여 년 전의 부끄러운 내 얘기를 했다. “너는 온종일 내 등에 업혀서 오줌만 쌌단다. 그래서 내 저고리 등판이 오줌에 절고 다 썩었었어.” 그게 사실이었다면 참 죄송하게 된 일인데 나는 어렸을 때 누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렇게 까불었다. “그 순간의 내 기분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네요. 포근하고 따뜻한 누나 등, 사타구니를 타고 내리는 따뜻한 온천물, 방광 문이 시원스럽게 열리는 짜릿한 배설감….” 나는 어린 누님이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그렇게 나를 업고 나가 놀았다는 성진(城津) 바닷가가 그립다. 바람 소리 파도 소리도 들려오는 것 같다. 그곳에 꼭 한번 누님을 모시고 가서 이번에는 내가 누님을 없고 조개도 주우며 그때 업힌 빚을 갚아 드리고 싶다. 그렇지만 서독처럼.. 2022. 2. 1. 이전 1 ··· 27 28 29 30 31 32 33 ··· 3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