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수필4137 75. 섬 섬/ 허창옥 장 그르니에가 말한 비밀스러운 삶, 조용한 삶을 나도 살고 싶다. 데카르트는 도시의 한복판에서 문명의 편리함을 충분히 누리며, 사람들 속에 섞여 떠들어대면서도 비밀스럽게 살았다고 한다. 장 그르니에는 또 자신이 어디에 있든 그곳이 곧 ‘섬’이라고도 했다. 어제와 오늘이 다를 것 없는 단순한 생활, 그 생활을 거리낌 없이 공개함으로써 오히려 정신만은 고요히 지켜내는 그런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게 어찌 가능하다는 건가. 뽀얗게 흐린 창밖을 내다보다가 우산을 찾아들었다. 시장에 갈 생각이다. 다리를 건너면 시장이다. 다리 중간쯤에 서서 강물을 내려다본다. 물이 깨끗하다. 시장부근이라 더러울 때가 많은데 오늘은 맑게 흐른다. 우산을 접고 비를 맞는다. 보슬비를 맞는 것이 이렇게 기분이 좋을.. 2022. 3. 3. 74. 살아있음에 대한 노래를 살아있음에 대한 노래를/ 임만빈 다리를 건넌다. 내를 건너면 대웅전이다. 다리 밑을 흐르는 물은 발뒤꿈치를 들고 걷듯 조용조용 흐른다. 검고 투박한 듯한 겨울의 인상이 몸에 투영되어 그렇게 정중하고 무거운 듯한 걸음걸이를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골짜기 위쪽에는 얼음이 아직 물 위를 덮고 있고 소(沼) 중앙에는 얼음들이 녹아 봄빛을 맞으려는 듯 가만히 가슴을 열고 있다. 물속에는 몇 마리의 산천어들이 유영하는 모습이 보인다. 날씨가 추우면 얼음은 산천어를 보호하기 위하여 두께를 더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날씨가 풀리니, 소(沼)가 몸을 풀고 산천어들에게 바깥구경을 시켜주고 있는 듯하다. 인간이나 자연이나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보듬고 안고 간다는 것, 약하게 보이면 보듬어 안고 강한 듯 설치면 버릇.. 2022. 3. 1. 73.보은 보은(報恩) -하길남 나는 이 세상에서 ‘좋아한다’는 말을 제일 좋아할 수밖에 없다. 그 다음으로 내가 좋아하는 말은 ‘보은(報恩)’이라는 말이다. 우리나라에는 이 보은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다리가 부러진 제비를 치료해 주었더니, 박씨를 물고 와서 보은을 했다거나, 과거를 보러가던 선비가 위기에 처한 까치를 구해주었더니, 그 까치들이 머리로 종을 쳐서 역시 위기에 처한 선비를 구해 주었다는 이야기처럼 말이다. 옛날에 우리는 살기가 매우 어려웠다. 얼마나 어려웠으면 돌아가신 박정희 대통령께서 너무 밥을 많이 굶어서 키가 크지 않았다고 했겠는가. 외국인 원수를 접견할 때마다 자신의 키가 너무 작아 언제나 고개를 들고 쳐다보면서 이야기를 나우어야 했기 때문이다. 한때 ‘보릿고개’라는 말이 유행했던 것을 보면.. 2022. 3. 1. 72. 버드나무 버드나무 -정성화 장터 한복판에 점포도 없는 가정집이 있다는 것은 싱거운 일이다. 왁자지껄한 시장바닥에 양 쪽 귀를 틀어막고 앉아있는 모양새의 집이 바로 우리 집이었다. 그래서 닷새에 한번씩 장날이 되면 시장판으로부터 온갖 실랑이와 악다구니가,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와 육두문자 섞인 욕지거리가 방안까지 차고 들어왔다. 우리 집이 ‘버드나무집'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집 앞 양쪽에 지붕 높이만한 버드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방바닥에 누워 창문을 올려다보면 버드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천막을 붙들어 맨 줄에 스칠려서 군데군데 나무껍질이 벗겨지고 위쪽으로 갈수록 성한 가지가 없는 나무였다. 때로는 매어놓은 줄이 너무 팽팽해서 나무는 중심을 잃은 채 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기도 했다. 나무는 우리가 그 집으로 이사 오.. 2022. 3. 1. 이전 1 ··· 14 15 16 17 18 19 20 ··· 3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