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수필4137 58. 풍죽을 그리며 풍죽을 그리며/ 이병남 방안에 동매(冬梅)가 벙그는 오후, 풍죽(風竹)을 그려 놓고 길동이의 퉁소 소리를 듣는다. 길동이는 내가 처음으로 좋아하는 사내요, 지금까지도 못 잊어 그리는 사내다. 대숲에 이는 바람이 유난히도 스산하던 겨울날 길동이와 나는 외갓집에서 첫 상면을 했다. 그 무렵 잠시 아버지와 헤어져 살게 된 어머니를 따라 나도 외갓집에서 살고 있었다. 길동이란 이름은 외할아버지께서 지어 부르신 이름이고, 그 청년의 본명은 아무도 모른다. 이름뿐만이 아니다. 그 청년이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떠나갔는지도 아무도 아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길동이를 만났던 사람들은 누구나 그 애절한 퉁소의 가락을 잊지 못한다. 길동이는 고향도 모르고 부모도 없다고 한다. 부모가 없으니 이름도 성도 분명치 않다는 것이다.. 2022. 2. 14. 57. 포클레인과 패랭이꽃 포크레인과 패랭이꽃 김수봉 아! 패랭이꽃이 피어있다. 포크레인 밑에서 여러 봉오리의 꽃이 피어오른다. 꽃들은 그 육중한 포크레인을 들어 올리려는 듯 뻗쳐오르는 활개로 한들거린다. 천변 둔치 길에서다. 가끔씩 오후의 걷기운동에 나서곤 하는 나의 산책로. 흘러가는 냇물에선 은빛 갈겨니들이 치뛰는 모습도 볼 수 있고, 키 높이로 자란 온갖 푸나무서리를 걷다보면 상큼한 바람과 만나기도 한다. 그 천변이 지난해 가을부터 뭉개지기 시작했다. 하천 정비사업이라는 이름으로 포클레인과 불도저가 들어와서는 높고 낮은 땅을 평평하게 고르고 굽이진 물길은 직선으로 바꾸어가고 있었다. 풀과 나무는 아무런 저항도 못한 채 무참히 갈아엎어졌고 깔아뭉개져 갔다. 관청에서 하는 일이라서 소수 시민의 반대 목소리는 불도저의 굉음에 묻혀.. 2022. 2. 14. 56. 폐인 폐인 권대근 ‘미치고 싶다’라는 말을 자주 하게 된다. 어찌 나뿐이겠는가. 어떤 이는 수필에 골똘히 몰두하니 잠 속에서도 수필의 꺼리가 떠오르더라고 하였다. 일 주일에 몇 편의 글은 무난히 쓸 수 있다고 말하는 분도 있다. 나의 트래이드 마크는 ‘수생 수사’다. 누구보다 ‘수필’에 미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마음에 남은 붉은 그림자, 그것이 수필임을 알기에 수필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내 행복이 되기도 하고 던져버릴 수 없는 시지프스의 큰 바위가 되기도 한다. 내가 ‘수생수사’ 수필폐인으로 불려지길 원한다면 남들은 욕심이 과하다고 말할까. 시간의 속도를 계산하는 현대인의 언어생활은 무척 생산적이다. 몇십 년을 살아온 사람들이 이해도 못할 우리말이 생긴다면 얼마나 곤혹스러울까. ‘폐인’이란 낱말이 있다.. 2022. 2. 14. 55. 커피 루왁 커피 루왁/ 안귀순 막내아들 내외가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던 날 밤, 오붓하게 가족끼리 티 파티를 열었다. 해외 주재원으로 있는 큰아들이 귀한 차라며 가져온 ‘커피 루왁’으로. 새 며느리를 환영하고 축하하는 마음으로 집안을 말끔히 치우고, 안방에는 부드러운 레드카펫을 깔았다. 조명등도 켜고, 분쇄기에 원두를 갈고 차를 우려내는 동안 둥근 상에 매화 무늬가 고운 찻잔을 올렸다. 커피메이커에서 보글보글 김이 피어오르면서 감미로운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다. 영화 ‘카모메 식당’에서 주인공 ‘사치에’가 원두를 내릴 때마다 커피 드리퍼에 손을 얹고 ‘커피 루왁!’ 하며 최면을 걸듯 차를 우려내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면 평범한 원두도 루왁처럼 맛을 즐길 수 있다나. 영화 ‘버킷 리스트’에선 억만장자 ‘에드워드’가 암으로.. 2022. 2. 14. 이전 1 ··· 18 19 20 21 22 23 24 ··· 3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