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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단편소설2

122. 폭군

by 자한형 2022.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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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 군 (暴 君)-홍성원

 

차가 강변에 도착했다.

해가 막 지고 있어서 강변이 온통 타는 듯한 놀빛이다. 일행 세 명이 차를 내려 빠른 걸음으로 강가로 다가간다. 햇빛에 바랜 횐 자갈들이 아래복 강가로 질펀히 깔려 있고 일행들이 서 있는 발 밑의 자갈들은 작은 둑처럼 약간 높게 쌓여 있다. 둑은 붉은 황톳길에서 시작되어 살얼음이 잡힌 강가에까지 연결되어 있고 강물과 둑이 맞닿은 곳에는 굵은 말뚝들이 장방형으로 박혀 있다. 말뚝으로 된 장방형 울타리 속에 자갈들이 황토와 섞여 제단처럼 편평히 다져졌다. 배가 땋고 떠나기 좋도록 나루터에 만든 발판이다.

강은 수심이 얕은 탓인지 물보라를 일으키며 아주 빨리 흘러간다. 아직 본격적인 추위가 닥치지 않아 강심(江心)에는 얼음이 얼지 않았다. 자갈이 드러난 얕은 강기슭에만 유리처럼 투명한 살얼음들이 잡혀 있다.

바람이 강 위쪽에서 살을 엘 듯이 차갑게 불어온다. 바람 속에서는 강물 특유의 야릇한 물비린내가 풍겨 온다, 강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폭이 좁아지고 수심이 깊어지고 있다. 이쪽에서 시작된 모래 섞인 자갈밭은 높게 깎아지른 바위산 밑까지 연결되었고 석양을 정면으로 받고 있는 바위산에는 몇 그루 안 되는 소나무 따위의 침엽수들이 강 쪽을 향해 위태롭게 박혀 있다. 강은 그 바위산을 돌아 물보라를 일으키며 시야에서 사라진다. 바위에 부딪는 높은 물이랑들이 마치 작은 물총새 떼처럼 석양에 하얗게 반사되고 있다.

운전을 맡았던 건장한 사내가 맞은편 강기슭을 바라보며 고개를 약간 갸웃한다. 강 저쪽은 나지막한 모랫둑이 강변을 따라 제방처럼 길게 뻗어 있다. 제방 위로는 키 큰 포플러 나무들이 횡대로 길게 들쭉날쭉 박혀 있고 나무들은 모두 잎들을 털어 버려서 앙상하게 가지들만 남아 있다. 석양이 포플러 가지 사이로 눈이 아플 만큼 강하게 비쳐 온다, 가지에 부딪혀 분산된 빛들이 한 무더기가 되어 강물 위로 쏟아진다. 강은 표면으로 햇빛을 번쩍이며 갈 길 바쁜 나그네처럼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

"곤란한데,,,,,, 배가 없어 "

사내는 장화로 얼음을 밟으며 강기슭을 떠나 세워 둔 차 앞으로 돌아온다, 노인과 청년이 차 앞에 섰다가 바람을 피해 강 쪽으로 등을 돌린다. 배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눈앞에 배를 뻔히 보고 있다. 배는 맞은편 강기슭의 커다란 말뚝에 단단히 묶인 채 짧은 로프를 팽팽히 당기고 강물을 따라 가로 길게 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된 거죠?”

청년이 추위에 억눌린 음성으로 혼자 말하듯 어눌하게 입을 연다.

"배가 있으니 사공도 있을 텐데, 뭐가 보여야 소리라도 쳐보죠."

노인은 청년을 무시한 채 눈을 가늘게 뜨고 강 저쪽을 바라본다.

눈어림으로 대충 계산해도 강폭은 칠팔십 미터가 착실하다. 수심은 별로 깊지 않았으나 물살은 사납고 매우 급하다. 모랫둑 너머에는 높은 산이 가로막아 모든 것이 컴컴한 산 그늘 속에 묻혀 있다. 모랫둑이 끝나는 왼쪽 강기슭에 작은 샛길이 비스듬히 뚫려 있고 길은 왼쪽으로 벼랑을 끼고 곧장 활엽수의 숲 속으로 사라진다. 대개 나루터가 있는 곳에는 사공의 집이 있게 마련인데 배만 강변에 묶여 있고 사공의 집은 아무 곳에도 보이지 않는다.

"어 이."

가죽 잠바에 탄띠를 두른 사십대의 사내가 저만치 서 있는 청년을 부른다. 목소리가 세찬 강바람 속에서도 통 속을 울리듯 힘차고 칼칼하다. 그는 눈에 갈색 라이반을 써서 표정을 전혀 알아볼 수 없다. 양피로 만든 쥣빛 털모자가 라이반과 맞붙어 얼굴을 거의 가리고 있다. 두꺼운 천의 수렵복 바지는 무릎과 엉덩이 쪽이 햇볕에 하얗게 바래 있다. 사내는 시계를 내려다본 뒤 청년을 향해 손가락을 탁 튕긴다.

"총을 가져오게,"

"총을요?”

"만일 저쪽에 사람이 있다면 총소리를 듣고 나타나겠지."

"허지만 사공이 나타난다 해두 이 차는 강을 못 건널 게 아닙니까?”

사내는 청년을 돌아본 뒤 아무 말 없이 강가로 걸어간다. 사내의 행동에는 어딘지 모르게 상대를 위압하는 고자세의 고집 같은 것이 숨겨져 있다. 그는 강가에 도착하자 한 손으로 옷을 쳐들어 허리에 두른 탄띠를 더듬는다. 잠바에 덮여 숨겨졌던 노란 엽탄들이 석양에 반사되어 가지런히 반짝인다. 그는 왼쪽 허리 부근에서 엽탄 한 개를 뽑아 든다. 엽탄은 그의 우람한 손안에 마치 길든 호두알처럼 조그맣게 쥐어진다,

청년이 세워 놓은 차로 돌아가 총신이 기다란 엽총 한 자루를 들고 온다. 엽총은 관리와 손질이 잘 되어서 갈색 개머리판이 금속을 입힌 듯 번쩍인다, 사내가 총열을 꺾어 능숙한 솜씨로 엽탄을 장전한다. 노인과 청년은 사내의 행동을 무표정한 얼굴로 잠잠히 바라볼 뿐이다, 총구를 맞은편 강변으로 향한 채 사내가 곧 엽총을 발사한다. 적막하던 강변과 산골짝에 총성이 돌연 광포하게 울려 퍼진다. 한동안 골짝과 번쩍이는 강물 위로 총성이 강철의 진동처럼 사나운 메아리가 되어 아득히 흘러간다. 사내가 총을 수직으로 쳐들고 얼음을 밟아 부수며 다시 차 쪽으로 돌아온다,

"아무도 없군."

"있을 턱이 없지."

노인이 말한다.

"무슨 소리요?”

"필시 그 산짐승 때문에 사공이 마을 쪽으루 피난을 갔을 게요."

"피난을?”

"사람이 벌써 둘이나 상했다니 누가 이런 외진 강변에 혼자 남어 배를 지키겠소."

사내가 잠시 노인을 마주 본 뒤 옆에 선 청년에게 총을 다시 건네준다.

"사공이 만일 마을루 갔다면 우리는 이 강을 건널 수가 없지 않소?

"차루 건넙시다."

노인이 빠르게 말하고 표정을 살피듯 사내를 올려다본다.

"어차피 사공이 있더라두 차는 여기다 남겨두구 사람만 배로 건너 갈 게 아니우?

사내가 다시 강 쪽으로 몸을 돌린다. 그들이 서 있는 강 상류 쪽은 유난히 물살이 세고 많은 물보라가 일고 있다. 수심이 얕고 바닥에 자갈이 깔려 있어서 그쪽은 강물이 더욱 빠르게 흐른다. 강 복판에는 자갈로 이룩된 작은 둔덕이 섬처럼 솟아 있고 강물은 그 자갈밭을 사이에 두고 물보라를 일으키며 급하게 흘러가고 있다.

"저쪽은 물이 얼마나 깊겠소?”

"깊어야 겨우 허벅지쯤 찰 게요."

"바닥에 자갈이 깔렸으면 몰라두 만일 모래라면 차가 물살에 밀려 뒤집힐 위험도 있소."

"물보라가 저렇게 드센 걸 봐서는 바닥이 모래 아닌 자갈이 분명합니다."

"좋소, 해 봅시다."

사내와 노인이 강변을 떠나 바쁜 듯이 차로 돌아온다. 청년과 노인이 차에 오르자 사내가 곧 운전석에 몸을 싣는다,

차는 좌석 뒤쪽으로 짐칸이 딸린 왜건이다. 짐칸은 약 한 평 넓이로 각종 짐들이 빼곡하게 실려 있다. 그들은 서울에서 이 곳으로 출발하기 전에 대충 일 주일분의 장비와 비품들을 준비했다. 그들은 이번 사냥길이 보통의 출렵(出獵)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을 파견한 수렵 협회에서도 그들의 이번 출렵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 협회가 그들에게 기대를 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수렵 협회에서는 지금의 남한 땅에는 대호(大虎))가 이미 멸종되어 없다는 것을 기정 사실로 믿고 있다. 대호는 1930년대를 전후해서 남한에서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대호가 왜 없어졌는지는 아직 확실한 이유가 밝혀진 바 없다. 몇몇 사람들은 심한 벌채로 대호가 서식할 숲이 없어졌다는 이유를 들고 또 혹자는 6-25전쟁 중에 대호가 총성에 쫓겨 모두 이북으로 월북했다고도 주장한다. 그러나 이유는 어찌 되었건 남한에는 분명히 대호가 자취를 감추었다. 남한에 호랑이가 서식하지 않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거의 확실한 정설로 입증되어 있다.

대호, 즉 호랑이는 몸통 길이가 이 미터를 웃돌고 몸무게는 대충 삼백 킬로그램에 육박한다. 행동 반경은 사방 백 리로, 말하자면 직경 이백 리 정도의 지역을 한 마리의 호랑이가 지배하는 셈이다. 대호가 한 번 배불리 먹는 양은 육류로 대강 칠팔십 근 정도다. 그는 백 근 짜리 돼지 정도는 단 한 번에 먹어 치운다. 하지만 한 차례 배불리 먹고 난 후에는 약 일 주일간 그것으로 만족하여 더 이상 먹지 않는다. 결국 남한에 대호가 서식하지 않는다는 증거는 대호의 무서운 포식량으로도 간접적으로 증명되는 셈이다. 대호가 일 주일에 육류 백 근을 먹어 치운다면 남한에는 그것을 먹여 살릴 만한 충분한 산짐승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사방 백 리 정도의 남한의 헐벗은 야산에는 실제로 대호가 포식할 만한 많은 수의 산짐승이 없다. 설혹 어느 깊은 산중에 그만한 산짐승이 있다고 하더라도 대호의 무서운 식욕 앞에서는 공급이 수요에 달려 겨우 한 달도 견디기 어렵다. 결국 대호는 산짐승이 없어지면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자연히 민가로 내려오게 마련인데, 남한에서는 아직 어디에서도 호환(虎患)을 입었다는 소문이 없다. 산짐승도 없고, 호환도 없다면 대호는 결국 남한 땅에 서식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러나 며칠 전 수렵 협회에서는 모 산간 지방으로부터 놀라운 사실을 통고 받았다. 대호가 어느 벽촌에 나타나 인명을 둘이나 해쳤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통고를 받은 협회에서는 의아해하면서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마을에 나타났다는 대호가 혹시 호랑이 아닌 표범이 아닌가 의심했다. 사실 전에도 비슷한 소문이 지방으로부터 전해졌으나 실제로 엽사(獵師)를 파견해 보면 그것은 대호가 아니고 작은 체구의 표범이기가 일쑤였다. 그러나 이번에 보내 온 보고는 대호라고 믿을 만한 특징들이 여러 모로 적혀 있었다. 구선 목격자의 증언으로는 짐승의 체구가 중송아지만큼 크다는 것이다. 발자국의 크기가 직경 십오 센티가 넘고 황소를 앞발로 쳐서 일격에 쓰러뜨렸다고도 했다. 협회에서는 곧 현지에 전문 엽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하긴 대호거나 표범이거나 희귀하기는 마찬가지다. 만일 그것이 대호라면 협회로서는 의외의 수확인 셈이다. 멸종되었다던 대호의 출현은 남한뿐 아니라 온 세계의 뉴스가 되기 때문이다. 협회는 즉시 인선에 착수해서 사내와 노인을 선발하여 현장 답사대로 파견한 것이다.

사내는 40대 중반으로 현재 모 국가 기업체의 사장이다. 그는 이태 전까지만 해도 군복을 걸친 군인의 몸이었다. 예편 당시의 그의 계급은 별 둘의 이성 장군이었다. 육 척에 가까운 훤칠한 키에 그는 뼈대가 지렛대처럼 억센 장한이다. 이마가 좀 불거지고 양미간이 좁아서 전체적인 인상은 어딘가 답답하고 우울해 보인다. 그러나 움푹한 눈에 얼굴 복판으로 매부리코가 큼직하게 굽어 있어서, 선이 뚜렷한 아래턱과 함께 강하고 고집스런 무인의 풍모가 있다. 특히 그는 두 팔이 길어 손 처리가 항상 어색하고, 오랜 군인 생활이 몸에 배어 행동에 매우 절도가 있다. 많은 부하들을 다루어 본 경험으로 그는 지도력이 자연스레 몸에 배어 있고, 상대가 아무리 키가 작아도 절대로 머리나 허리를 굽혀 상대의 키에 맞춰주지 않는다. 언제나 철장 같은 꼿꼿한 자세로 상대방의 정수리를 향해 일방적으로 지껄이는 것이다.

그는 이번에 노인과 동행하게 된 출렵에 경비 일부를 출연(出捐)할 만큼 무척 열심이고 관심 또한 대단하다. 사냥 경험이 십 년이 넘어 그는 협회 내에서도 알아주는 실력자며 사냥할 때 과학적인 기구를 많이 이용하여 그것으로도 유명하다. 조준을 좀더 정확히 하기 위해 늘 망원 렌즈를 휴대하고 몰이꾼들과 연락을 취하기 위해 그는 휴대용 무전기까지 사용한다. 포획한 짐승을 달고 재기 위해 간단한 저울과 자도 휴대하고 야간 조준의 편리를 도모해서 그는 야간용 조준기까지 준비한다. 그가 사용하는 엽총과 엽탄은 모두 세계적으로 이름난 회사의 제품이다. 특히, 그는 사냥꾼 특유의 직감이나 육감을 믿지 않아서 사냥에 따르는 여러 가지 행동 수칙을 대부분 과학적인 장비와 기계류에 의존하고 있다. 결국, 그는 사냥의 재미를 동물을 추적하고 사살하는 데 두고 있으며 동물과의 숨가쁜 대결에서 자신의 지혜와 용기가 우월함을 확인하고 싶어한다. 그의 생각에는 모든 동물들은 잡히기 위해 존재할 뿐이며 일단 잡기로 결심한 짐승은 어떠한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잡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미인 것이다.

차가 타이어로 자갈을 퉁기며 강을 거슬러 위쪽으로 천천히 굴러간다. 해가 그 동안 많이 기울어서 강물이 온통 핏빛이다, 강은 상류로 올라갈수록 강폭이 점점 넓어지고 거기서 다시 위로 가면 자갈밭 끝머리에 모래 섞인 수초 밭이 이어진다. 수심이 얕고 물살이 없는 곳에는 제법 두툼한 얼음들이 잡혀 있고 물살에 떠밀린 잡목과 풀줄기가 모래톱 기슭으로 퇴비처럼 높게 쌓여 있다, 물총새 비슷한 들새 두 마리가 차를 피해서 쏜살같이 강심으로 날아간다. 차는 거칠게 자갈밭을 벗어나 살얼음이 잡힌 강가로 접어든다.

타이어 밑으로 얼음 조각들이 콩깍지가 부서지듯 와삭와삭 건조하게 부서진다. 물 속으로 들어선 차는 속력을 줄여 저속으로 나아가고 있다. 차창을 통해 바라보는 질펀한 강물은 너무 맑고 투명해서 유리 속을 보는 것 같다. 사내가 턱을 안으로 당긴 채 보닛 너머로 긴장하여 강심을 바라본다 앞바퀴와 범퍼가 물살을 밀어서 보닛 위로는 끊임없이 물이 튀어 오른다. 기어를 일단으로 변속하여 사내가 엔진의 출력을 높인다. 물살을 옆으로 받고 있어서 차체가 조금씩 강 하류로 밀리는 느낌이다. 물은 겨우 정강이가 빠질 정도의 깊이여서 차 바퀴가 잠길 정도는 아니다. 사내가 강물을 보기 위해 한 손을 뻗어 운전석 도어를 연다.

짝 열린 도어를 통해 차가운 강바람이 세차게 불어 든다. 차는 불규칙한 자갈들의 충격으로 춤을 추듯이 껑충껑충 좌우로 흔들린다. 그러나 솟구치고 가라앉고를 반복하면서도 멈추거나 떠밀리지 않고 계속 느릿느릿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갑자기 차체에 충격이 전해지고 열어 놓은 도어를 통해 강물이 왈칵 넘쳐 든다, 사내와 노인의 오른쪽 몸에 솟구친 강물이 분수처럼 뿌려진다. 차는 한동안 발판을 잃은 듯 강물을 따라 이삼 미터쯤 흘러 내려간다. 다행히 발동이 꺼지지 않아서 차는 위태롭게 발판을 되찾는다. 자갈을 차고 물살을 가르며 차는 다시 힘겹게 앞으로 전진한다.

맞은편 강변에는 자갈 대신에 희고 고운 강모래가 묘한 무늬로 깔려있다. 해가 완전히 산 뒤로 잠겨서 강변은 어느 새 짙은 그늘 속에 묻혀있다.

위험을 넘겨 강심을 벗어나자 사내가 차를 세우고 몸에 튄 물기를 타월로 닦아 낸다. 물은 몸에만 뿌려진 게 아니고 윈도와 시트와 천장에까지 튀어 있다. 찬 강물이 옷에 스며들어 노인은 전신에 싸늘한 한기를 느낀다. 차는 물 밖으로 솟아오르자 커다란 물걸레처럼 사방으로 물을 쏟아 내고 있다. 사내가 타월로 윈도를 훔친 뒤 물이 빠지기를 기다린 후 차를 다시 앞으로 몬다. 모래밭과 잇닿은 기다란 둑은 약 사오 미터 높이로 비스듬히 위로 뻗어 있다. 모래밭이 강 쪽으로 완경사를 이루고 있어서 그 위를 오르는 차가 왼쪽으로 위태롭게 기울어 있다. 포플러 낙엽들이 바람에 불려 사방 모래밭을 거의 샛노랗게 뒤덮고 있고 잎들이 진 포플러 가지들은 강바람을 받아 진자(振子)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다. 사내가 한 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 옆에 앉은 노인을 자랑스레 돌아본다.

"차가 역시 기운이 좋군, 하마터면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될 뻔했소."

노인은 별말 없이 무표정하게 앉아 있다. 그는 이 중년 사내와 동행하게 된 것이 처음부터 못마땅하다. 거만하고 무뚝뚝한데다가 아무에게나 명령하듯 하는 이 사내가 노인에게는 단단하고 매끄러운 쇠붙이처럼 정이 통 느껴지지 않는다. 사실 노인은 사냥꾼 중에서도 큰 짐승만을 주로 사냥해 온 한국에서는 전설적인 원로급 전문 엽사다. 그는 사냥말고는 배운 일이 따로 없어서 도시에 여러 해째 살고 있으면서도 생활이 늘 불안하고 구차하다. 더구나 몇 해 전에는 친구처럼 지내던 늙은 아내까지 세상을 떠나서 그는 더욱 가난에 쪼들렸고, 몸담을 방 한 칸도 없이 이리저리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노인이 정작 두려워하는 것은 도시 생활의 어려움이 아니고 몸이 늙어 다시는 사냥을 못 하게 되는 것이다. 칠십을 바라보는 그의 몸은 어느 새 탄력을 잃어 모든 근육들이 후줄근히 처져 있고, 눈마저 어둡고 침침해져서 요즘은 돋보기를 써야 작은 물건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그는 엽총만 손에 쥐면 금세 젊은 사람처럼 생기가 돌고 온몸에 힘이 난다. 사실 노인이 이 황량한 도시에서 그나마도 마음 붙이고 사는 것은 겨울 한철 그에게 주어지는 사냥과 관계된 일 때문이다. 노인은 겨울철이 되어 사냥이 시작될 무렵이면 이틀이나 사흘씩 부자들에게 부정기적으로 고용된다. 노인을 고용하는 부자들은 대부분 엄청나게 돈이 많은 아마추어 사냥꾼들이다. 그들은 노인을 사냥 안내인으로 고용해서 겨울철 엽장(獵場)을 찾아 전국으로 휘몰아 다닌다. 힘 좋은 외국차를 타고 값비싼 엽총에 번쩍이는 가죽 장화를 신고, 그들은 사냥도 즐기고 사우나도 즐기고 방금 쏘아 죽인 산돼지 몸통에서 뜨끈뜨끈한 생피도 몸에 좋다면서 한 사발씩 퍼 마신다. 노인은 그들이 총을 쏘아 짐승을 잡을 수 있도록 짐승의 길목과 짐승의 발자국과 짐승의 은신처를 일러줘야 한다. 그들에게 고용된 이상 노인은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고는 절대로 총을 쏘아 짐승을 잡아서는 안 된다.

그는 다만 숨어 있는 짐승을 숲 밖으로 몰아내거나 짐승이 다니는 길목과 짐승의 발자국 따위만을 그들에게 일러주어야 하는 것이다. 노인은 이런 돈 많은 사냥꾼들을 마음속으로 수없이 경멸하고 멸시하지만 얼굴에는 그런 내색을 조금도 드러낼 수가 없다. 사실 그들에겐 짐승 사냥이 조기 축구나 사교춤 같은 흥겨운 놀이에 불과하다. 그들에겐 세상의 모든 들짐승은 사냥되기 위해 존재할 뿐이어서 때로는 다 먹지도 못할 짐승을 수십 마리씩 미친 듯이 사냥할 때도 있다. 노인은 이런 사냥이 옳지 않은 것이며 추하고 부끄럽고 부도덕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실 노인은 사냥을 할 때 자기가 쫓는 짐승을 마음속으로 깊이 사랑하고 동정한다, 상대가 영리하고 교활하며 민첩할 때는 노인은 그 짐승을 마음속으로 아낌없이 칭찬도 한다. 노인은 사냥을 하는 동안은 짐승과 자기가 은연중에 한 몸이 되는 것을 알고 있다. 쫓기는 짐승이나 쫓는 사람이나 피차 최선을 다할 뿐 조그마한 양보도 없다. 그는 이런 추적 중에는 아무 잡념도 품지 않는다. 사냥이 시작되면 짐승을 잡거나 놓치거나 그런 것은 이미 노인의 관심 밖이다. 쫓기는 짐승은 살기 위해서 사기의 최선을 다할 것이고 쫓는 사람은 잡기 위해서 역시 최선을 다할 뿐이어서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가는 별로 마음 쓸 일이 아니다. 결국 사냥의 승패는 짐승과 사냥꾼의 지혜와 담력과 인내력에 달려 있다. 최선을 다한 끝에 노인에게 남는 것은 겨룸의 결과가 아니라 녹녹지 않은 상대에 대한 마음으로부터의 존경과 사랑이나.

", 저기 집이 보이는군."

사내가 차를 강둑 위로 몰며 언덕 위 잡목 숲 쪽을 턱으로 가리킨다, 모랫둑이 끝나는 밋밋한 공터 아래로 작은 실개천이 강 쪽으로 흘러들고 자갈이 곱게 깔린 개천에는 물이 얼어 유리를 간 듯 매끄럽다. 집은 바로 개천 왼쪽의 높은 잡목 숲에 숨듯이 엎디어 있다. 차가 엔진 소리를 울리며 나루터 앞 공터를 빠르게 지나친다. 길에서 연결된 좁직한 나루터에는 커다란 목선이 짧은 로프에 팽팽히 묶여 있다. 목선은 오랫동안 비바람에 깎여 오래 된 짐승의 뼈처럼 꺼칠하고 앙상하다. 개천을 건너고 길 위로 올라서자 주위의 숲이 짙어 부근 일대가 캄캄하다. 집은 잡목으로 짙게 둘린 제법 높은 언덕 위에 지붕 마루만 겨우 보일 정도로 납작하게 땅에 붙어 있다. 차가 가까이 접근하자 열 걸음쯤 앞쪽에 집의 전모가 드러난다, 사공막이 분명한 그 초가집은 지붕이 너무 오래 되어 골이 깊게 패어 있고, 그 골에는 마른 박덩굴이 낡은 어망처럼 어지럽게 얽혀 있다. 얼어서 딱딱해진 황톳길 오른쪽은 역시 덩굴진 잡목들이 어둡게 뒤엉켜 있고, 잎들이 진 잡목들의 가지에픈 이름 모를 빨간 열매들이 작은 생물들처럼 똘망똘망하게 매달려 있다. 차는 곧 초가가 올라선 언덕 밑 층계 앞에 멈춰 선다.

"박 포수, 집에 좀 가 봅시다."

사내가 노인을 돌아보며 한 손으로 차 문을 연다. 노인은 사내가 내리기를 기다려 역시 차에서 길 위로 내려선다. 바람이 강 쪽에서 거칠게 불어 와 부연 황토 먼지를 훅하니 얼굴에 끼얹는다. 그 동안 해가 완전히 서산에 져서 주위가 좀더 어둡고 음산하다. 초가로 오르는 높은 돌층계는 사람들이 자주 오르내려서 돌들이 매끈하게 닳아 있다. 사내가 언덕 밑 물도랑을 건너 비스듬한 돌층계를 앞서 오르기 시작한다. 층계 양쪽에는 하얀 갈대들이 바람에 쓸려 가지런히 누워 있다. 햇빛에 건조된 갈대 잎과 줄기들이 바람에 불리어 끊임없이 버석댄다. 대여섯 걸음쯤 되는 층계는 곧바로 초가의 뒤뜰과 연결되어 있다.

층계를 다 오른 두 사람은 잠시 인적 없는 집 안팎을 둘러본다.

초가 앞쪽은 강을 향해 넓고 시원하게 열려 있고 그 위에서 굽어보이는 강물은 어둠이 깃든 거대한 계곡 사이를 유유히 흘러간다. 강 이편 뒤쪽 산에는 오래 된 침엽수림이 검은 덩어리로 울창하게 덮여 있고 그 사이에 검게 노출된 반점들은 커다란 바위이거나 화강암 절벽쯤이 될 것이다. 산들이 겹겹으로 잇대어 있거나 겹쳐 있어서 주위에는 조그마한 들판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방금 지나온 자갈밭이 어둑한 황혼 속에 유일한 들로 길게 누워 있다. 두 사람은 곧 어깨를 움츠리고 강 쪽에서 다시 초가를 향해 몸을 돌린다,

초가는 부엌과 마루와 방이 하나로 잇닿은 삼간 구조로 되어 있다. 흙벽과 서까래와 꾸불텅한 기둥들은 오랜 세월 연기에 그을려 거무튀튀한 흑갈색이다, 굴뚝이 박힌 집 처마 밑에는 윗부분이 깨어진 오줌독이 하나 놓여 있고 굴뚝 주위에는 무수한 거미줄에 검은 그을음이 검불처럼 매달려 있다. 그들은 초가를 왼쪽으로 돌아 장독들과 땔나무가 쌓인 앞뜰로 들어선다. 앞뜰은 대여섯 칸 넓이로 반쯤 기울어진 싸리 울타리를 둘러치고 있다. 얼마 전까지도 사람이 살았던 듯 우물가에는 뜻밖에도 말짱한 두레박이 놓여 있다. 사내가 마당을 가로질러 살대만 남은 방문 앞으로 다가간다. 그러나 방안을 들여다본 그는 다시 몸을 돌려 부엌 쪽으로 걸어간다. 부엌과 방을 경계 짓는 기둥에 자그마한 나 무패가 걸린 것이 눈에 띈다. 나무패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 있고 구멍에는 단순한 모양의 긴 열쇠가 묶여 있다. 사내가 나무패를 기둥에서 벗겨 내어 잠시 앞뒤를 살피듯이 뒤집어 본다. 나무패에는 서툰 한글 글씨로 이런 말들이 씌어 있다.

 

사공은 당분간 이 집에 없습니다. 배를 쓰실 분은 이 열쇠를 이용하십시오.

 

사내가 나무패를 제자리에 걸어 놓고 난감한 표정으로 노인 쪽을 돌아본다. 노인은 그러나 미리 알고 있었던 듯 별다른 내색 없이 생각에 잠겨 강 쪽을 바라본다. 사내가 곧 노인에게 다가가 잘못이라도 추궁하듯 퉁명스레 입을 연다.

"아무도 없소, 당신 말대루. 사공이 아마 도망친 모양이오."

"저건 무슨 열쇠요?”

"배를 자물쇠로 채워 놨다는군. 저게 바루 그 열쇠요."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앞장서 뜰에서 층계 위로 돌아 나온다. 황혼이 깃든 좁은 하늘에 날개 벌린 솔개 한 마리가 느릿느릿 날고 있다,

 

(중 략)

 

놀 속으로 휘날리는 눈가루가 마치 잘게 썬 쇳가루처럼 칙칙하고 무거워 보인다. 해가 벌써 산너머로 저물어서 주위에 어둑어둑 땅거미가 내리고 있다.

노인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자기 위치를 가늠해 본다. 그는 지금 협곡 중간쯤의 경사가 완만한 떡갈나무 숲 속에 서 있다. 맞은편 산비탈은 경사가 급해 거대한 침엽수가 층계처럼 층층으로 박혀 있다. 산봉우리 주위에서 시작된 협곡이 마치 부채처럼 널따랗게 밑으로 퍼졌다. 노인은 대충 산세를 둘러본 뒤 방향이 정해지자 다시 숲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노인이 처음 범을 본 것은 추적이 시작된 지 열한 시간 만이었다. 그는 토끼털의 개활지를 통과한 뒤 추적 속력을 빨리 하여 범과의 거리를 단축시켰다. 만일 짐승이 어떤 장소에서 한 번만 더 쉬어 준다면 그는 짐승을 거의 눈앞으로 따라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짐승은 개활지 이후로는 한 번도 걸음을 멈춘 듯한 기색이 없었다. 더구나 그 놈은 중간 중간의 눈밭을 피해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갔다. 범이 숲 속으로 들어가면 노인은 그만큼 추적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숲 속에는 눈이 쌓여 있지 않아서 족적을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짐승은 노인에게 뜻밖의 시간을 벌어 주고 있었다. 그는 능선

으로 계속 가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에서인지 가던 길을 되돌아오고 있었다, 한데 그 되돌아온 족적이 노인에게 우연히 발견된 것이었다. 노인은 그것이 먼젓번의 족적보다 적어도 두 시간 이상 새로운 것임을 알아내었다. 발자국들이 너무 선명하고 신선해서 범의 콧김까지 가려질 정도였다. 그러나 노인에겐 그 때 이후가 추적 중에 가장 어려운 고비였다. 범과 거리가 단축되었다는 것은 노인에겐 물론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거리가 단축되면 단축될수록 실은 노인에게 불리할 수도 있다. 요컨대 범과 노인 둘 중에 누가 먼저 상대를 발견하는가가 문제였다. 노인은 그 때 자기와 범이 불과 한 시간의 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산중에서의 한 시간이라는 것은 거리로는 불과 십 리 정도였다. 그러나 그 십 리의 거리가 때로는 건너다 보이는 계곡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을 수도 있었다. 노인은 자기가 너무 범에게 가까이 접근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사실 범이 노인의 추적을 지금쯤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렇다면 노인은 다른 방도를 강구해야 하는 것이다.

노인은 그러나 족적만으로 판단해서는 범이 아직 자기의 추적을 모르고 있다고 단정했다. 노인이 그런 단정을 하는 데는 몇 가지 그럴 만한 근거가 있다. 범들은 자기가 추적된다는 것을 알면 대개 상황과 분위기에 따라 세 가지 반응을 보여 준다. 첫번째는 범이 능동적으로 인간에게 위협을 가해 추적을 포기하도록 하는 행위다. 말하자면 내가 이곳에 있느니 어서 돌아가라는 신호인 셈이다. 둘째 번 반응은 그들의 반응 중에 가장 흔히 보는 일종의 도주다. 그들은 일단 도망을 시작하면 보통 삼사 십 리 거리를 단숨에 달아난다. 끝으로, 약간 드문 예 중의 하나지만 그들이 아무 예고 없이 추적자를 오히려 역추적해 오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노련한 사냥꾼이라면 그들의 족적을 보고 미리 대충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이 역습을 준비할 때는 짐승 자신이 긴장하여 평소보다 갑자기 발자국이 작아지기 때문이다.

노인의 발자국 추적은 그 후로도 약 네 시간이나 계속되었다. 그리고 해가 거의 서산으로 질 무렵 노인은 드디어 범의 뒷모습을 본 것이다.

노인이 범을 발견하게 된 것은 공교롭게도 노인이 저지른 실수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족적을 추적하면서 범을 시종 경계하고는 있었지만 범이 그토록 가까운 거리로 다가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사실 그 때 노인과 범과는 직선 거리로 불과 삼백 미터밖에 되지 않았다. 다행히 바람을 마주했기에 망정이지 바람을 등지고 있었다면 짐승이 오히려 그를 먼저 보았을지도 몰랐다. 좌우간 노인은 범을 발견하고 숨이 막힐 만큼 놀라고 긴장했다. 범은 그 때 깊은 골짝을 벗어나 서쪽 산중턱을 느릿느릿 오르는 중이었다. 산중턱에는 두어 길쯤 되는 작달막한 잡목 숲이 펼쳐 있었다. 마침 해가 산등성이에 가려서 골짝엔 깊은 응달이 져 있었다. 노인은 짐승을 자세히 보기 위해 능선을 따라 조심스레 옆으로 움직였다. 노인의 위치는 산중턱을 마주 보는 바위투성이의 높직한 능선상이었다. 그는 말하자면 능선 위쪽에서 범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었다. 범은 그가 예측한 대로 드물게 보는 육중한 거구였다. 두동의 길이가 한 발 반이 넘을 듯하고 몽둥이 같은 굵은 꼬리도 한 발은 됨직했다. 찬바람이 계속 서쪽에서 산중턱을 거쳐 능선 위로 불어 왔다. 노인에겐 그러나 위치는 좋았지만 햇빛이 바로 비쳐 눈을 제대로 뜨기가 어려웠다. 더구나 그는 눈밭 위를 여러 시간 돌아다녀 그 즈음엔 벌써 시력이 형편없이 피로해 있었다. 그는 대강 눈어림으로 계산하여 범과의 거리가 삼백 미터쯤이라고 추정했다. 사실 삼백 미터라는 직선 거리는 사격에는 지나치게 먼 거리였다. 그는 골짝을 크게 돌아 범을 길목에서 지킬까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골짝을 돌아내려 가기에는 해가 너무 짧아 보였다. 그는 다시 능선을 따라 몸을 조금씩 이동시켰다. 거리를 조금만 단축시킨다면 사격이 가능할 것도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때 노인에게는 또 하나의 숨막히는 기적이 일어났다. 짐승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산비탈을 비스듬히 가로질러 오는 것이었다.

노인은 뱃살이 굳을 만큼 전신에 긴장과 흥분을 느꼈다. 그는 총신을 조심스레 들어올려 사격하기 좋도록 나뭇가지에 걸쳐놓았다. 그는 마치 신령에게 치성 드리는 기분으로 범이 가까이 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범은 늘 하는 버릇대로 사방을 경계하며 계속 유유하게 능선 쪽으로 다 가왔다. 앞발에 눈가루가 챌 때마다 짐승은 귀찮다는 듯 고개를 크게 좌우로 내젓곤 했다. 드디어 범이 능선을 가로질러 이백 미터 지점까지 접근해 올라왔다. 노인은 조준을 시험하기 위해 개머리판을 천천히 어깨 쪽에 갖다 대었다. 그러나 노인이 총을 견착하고 가느다란 조준간을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노인은 갑자기 총을 내리고 자기 눈을 손등으로 부드럽게 비벼대었다. 눈을 껌벅이고. 눈물을 닦아 내고 그는 한동안 눈물이 마르도록 바람맞이 쪽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드디어 그는 용기라도 떨치듯 다시 총을 집어들어 어깨 위로 가져갔다. 그러나 두 번째로 어깨에서 총을 내린 노인은 갑자기 한쪽 입귀를 심하게 씰룩대기 시작했다. 검게 그을린 그의 얼굴에 문득 슬픔과 고뇌의 빛이 떠올랐다. 그는 이미 시력이 감퇴되어 조준간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검은 하늘에 희끗희끗하게 눈발들이 날리기 시작한다, 노인은 총을 왼손에 처뜨린 채 다래 덤불 속을 조심스레 기어간다. 그는 자기가 지금 어느 만큼 산중 깊숙이 들어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시장기가 점점 심해지는 것으로 보아 그 동안 시간이 퍽 오래 지났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바람이 갑자기 소용돌이를 일으켜 노인의 얼굴에 눈송이를 덩어리로 끼얹는다. 족적은 어느 새 노인과 짐승을 불과 십여 분 거리로 좁혔다. 조준간이 보이지 않는 노인은 이제 자기 시력에 자신을 잃었다, 시력이 어차피 못 쓰게 되었다면 그는 눈어림으로 사격하는 도리밖에 없다. 어림 사격이 얼마나 무모한가는 노인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

것이 특히 범 같은 맹수일 때는 짐승의 역습은 치명적인 것이 된다. 노인은 그러나 무리를 해서라도 범과의 거리를 단축하는 도리밖에 없다. 원거리 사격은 이미 노인에겐 불가능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눈발이 점점 짙어지며 어둠이 갑자기 숲 주위를 둘러싸기 시작한다. 노인은 덤불을 조심스레 빠져 나와 잠시 숲 주위를 침착하게 둘러본다. 숲이 마치 언젠가 와 본 듯 그의 눈에 친숙해 보인다. 산밑으로 뻗은 계곡에는 흰 갈대들이 무성히 뒤덮여 있고 골짝에 흩어진 크고 작은 바위들은 눈들을 덮어써서 흡사 작은 무덤들 같다. 족적은 다시 산비탈을 새려와 계곡 쪽으로 기다랗게 찍혀 있다. 눈발이 너무 세차게 휘몰아쳐 노인은 이제 앞을 잘 볼 수가 없다. 간밤에 언 땅에서 노숙을 한 탓인지 무릎 부근의 뼈마디들이 망치로 치듯 정정 아파 온다 노인은 어제 그 일을 당한 후 갑자기 자신의 신세가 못 견디게 처량하고 슬퍼졌다. 어쩌면 그에겐 이번 사냥이 마지막 사냥이 될지도 알 뚜 없다. 아니 마지막이 될지가 아니고 분명 이번이 마지막 사냥일 것이다. 그러나 이왕 마지막이 될 바에는 노인은 그것을 좀더 그럴싸하고 멋진 것으로 만들고 싶다. 짐승과 끝까지 지혜를 겨루어 깨끗하고 후회 없는 아름다운 사냥으로 말이다,,,,,,.

노인은 발걸음을 세우고 자기 발 밑을 찬찬히 둘러본다. 서 있는 땅이 너무 반반하고 평탄해서 그는 마치 인간들이 일군 밭 속에 서 있는 것 같다. 그는 곧 수렵화 끝으로 발 밑의 눈들을 조심스레 헤쳐 본다. 갈대 줄기 비슷한 마른 풀잎들이 눈 속에 파묻힌 채 삐죽삐죽 솟아올라 있다. 노인은 다시 허리를 굽혀 네댓 개의 풀줄기를 손으로 집어 올린다. 그러나 풀줄기를 집어 올린 노인은 갑자기 입을 벌린 채 아연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그것은 뜻밖에도 그가 잘 아는 밭벼를 훑어 낸 뒤의 생생한 볏줄기들이다, 노인은 곧 볏짚을 내려놓고 논을 가로질러 산록 쪽으로 올라간다. 볏짚이 만일 이런 곳에 있다면 반드시 근처에 민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산비탈로 올라가던 노인은 다시 그 자리에 엉거주춤 발을 세운다. 그는 어느 새 범을 따라 부락 가까이로 내려온 것을 깨닫는다. 범은 노인을 뒤로 단 채 산중을 벗어나 다시 부락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짙은 눈보라가 눈앞으로 몰아쳐서 네댓 걸음 앞도 보이지 않는다. 노인은 범을 뒤따라 이제는 거의 뛰다시피 계곡으로 달려 내려간다. 그는 자기의 이틀간의 추적이 이렇게 허망하게 보람없이 끝날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 거대한 짐승, 그놈은 과연 지혜롭고 대담하며 영특하다! 노인은 갑자기 짐승을 향해 진정에서 우러나온 찬사와 경탄을 보낸다. 그놈은 정말 노인이 겪어 본 그 어느 짐승보다도 끈덕지고 담대하다. 그놈은 결국 노인을 거느리고 이틀 간 이곳 저곳 산 구경을 시켜 준 셈이다. 그 리고 이제 구경이 끝나자 다시 노인을 안내하여 마을로 내려온 것이다. 노인은 나뭇가지에 얼굴을 찢겼으나 상처에는 별로 개의치 않는 표정이다. 범이 다시 마을로 향한 이상 그는 한시도 지체할 여유가 없다. 갑자기 부락 숙소에 남아 있을 사내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는 지금쯤 혼자 떠난 노인을 이를 갈며 원망하고 미워할 것이다. 아니 지금쯤은 부락을 떠나 서울로 돌아갔을지도 알 수 없다. 그리고 저 부락 사람들. 그들은 또 얼마나 안타깝고 가여우며 한심한가. 담장이 무너지고, 가축이 물려가고 팔뚝이 잘리고, 집안 식구가 물려 죽고,, ,,,, 그러나 그들은 그 포악한 짐승에게 오히려 제를 올리고 머리를 숙여 경배까지 하고 있다. 그들은 마치 폭군 밑에서 소리 없이 울고 있는 어느 나라의 가여운 백성들과 흡사하다.

가방이 온통 눈발에 휩싸여 장막을 친 듯 어둡고 침침하다. 부락은 짙은 눈보라에 갇혀 아직은 노인에겐 윤곽조차 보이지 않는다. 야트막한 잡목 숲을 빠져 나와 노인은 억새가 무성한 작은 공지로 들어선다. 문득 왼쪽 높은 바위 위에서 눈 한 무더기가 노인 앞으로 쏟아져 내린다. 노인은 무심히 눈을 피하고 두어 걸음 다시 앞으로 얼어간다. 그러나 노인의 무심한 머릿속에 순간 서늘한 예감이 떠오른다. 노인은 주춤 발을 세우고 천천히 조심스레 바위 위를 올려다본다. 아니 올려다보는 자세 그대로 노인은 돌이라도 된 듯 싸늘하게 굳어 버린다.

노인이 범을 올려다본 것과 범이 일어선 것과는 동시였다. 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나란히 동시에 고개들을 마주 돌렸다, 바위는 약 두어 길 높이로 그 위에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았다. 범은 갈기 달린 커다란 머리통에 가려 어깨 뒤쪽은 보이지 않는다. 얼핏보면 그것은 마치 짙은 물감으로 그려 놓은 환상의 탈처럼 현실감이 없다, 눈 내리는 억새밭 한복판에 노인은 무심한 표정으로 조용히 서 있다. 바위와 노인과의 직선 거리는 불과 네댓 발이 될까말까 하다. 그들은 지금 누가 먼저 움직일 것인가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다. 노인은 짐승과 눈이 마주치자 머릿속이 갑자기 싸늘하게 맑아졌다. 그는 짐승이 왜 자기를 덮치지 않는지 잘 알고 있다. 노인이 짐승에게 놀란 만큼 지금은 짐승도 노인에게 무섭게 놀란 상태다. 사실 범들은 사람과 마주치면 사람 못지 않게 놀라고 당황한다. 그들은 표정만 변치 않을 뿐 사실은 사람을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로 알고 있다. 범은 지금 자기가 움직이면 노인이 공격해 오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더구나 노인의 한쪽 손에는 그 '공포의 쇠붙이'가 단단히 들려져 있다. 그러나 움직일 수 없는 것은 노인도 마찬가지다. 그는 조금만 움직여도 범이 자기에게 덮쳐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지금 당장은 어느 쪽도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짙은 눈보라가 계곡 위쪽에서 바위 전면으로 끊임없이 휘뿌린다. 노인과 범은 퍽 오랜 동안 같은 자세로 꼼짝없이 대치해 있다. 그러나 이들의 불편한 눈 싸움이 언제까지 계속될 수는 없다. 노인이 드디어 이 눈싸움의 종결을 짓기로 마음먹는다. 그는 어차피 범을 뒤쫓아 꼬박 이틀을 산중으로 찾아다닌 몸이다. 비록 우습고 기이하게 만났지만 이것도 역시 그가 만든 추적의 결과인 것이다.

일단 마음이 정해지자 노인은 모든 상념들이 깨끗하게 머리에서 사라진다. 그는 짐승에게 눈길을 향한 채 서서히 아주 조금씩 왼손을 들어올리기 시작한다. 너무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서 그 동작은 주의하지 않으면 알아챌 수 없을 정도다. 노인은 자기가 범을 쏘는 순간 자기도 범에게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범은 아마 총을 맞는 순간 바위 위에서 빛처럼 노인에게 덮쳐올 것이다. 오백 근의 무게와 기둥 같은 앞발에는 인간에 대한 복수심과 불같은 노여움도 포함될 것이다. 그러나 노인은 그런 죽음이라면 오히려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제 살만큼 살았고 몸도 늙고 피폐해서 총의 가늠쇠도 볼 수가 없다. 사냥꾼이 사냥터에서 죽는다면 그 이상 더 바랄 것이 없는 것이다.

드디어 총을 잡은 노인의 왼팔이 정확하고 침착하게 가슴 위로 올라온다. 총구가 조금씩 방향을 바꿔 바위 위에 엎디어 있는 짐승의 양미간으로 옮겨간다. 노인은 그러나 조준이 완료되자 갑자기 짐승의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싶다. 그것은 자기가 그토록 경탄하던 담대하고 지혜로우며 비길 데 없이 강한 얼굴이다. 노인이 드디어 바른쪽 식지를 방아쇠 울에서 안으로 옮겨 방아쇠 안에 살며시 건다. 그가 총구로 겨눈 장소는 짐승의 불길 같은 두 눈 사이다. 노인은 마치 섬세한 악기라도 다루듯 침착하면서도 단호하게 엽총의 방아쇠를 당긴다. 그것은 모두 삼 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일어난 일들이다.

 

차가 공회당 앞을 지나 느린 속도로 부락을 떠나기 시작한다, 올 때와는 달리 그들의 차 안에는 두 명의 사람밖에 타고 있지 않다. 청년이 룸미러 속으로 사내 쪽을 힐끔 돌아본다. 뭔가 망설이는 표정이더니 청년이 조심스레 입을 연다.

"사장님 전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모르겠어요. 어쩌다 일이 그렇게 됐죠? 영감님은 왜 죽은 거죠?”

사내가 몸을 꿈틀하더니 청년을 꾸짖듯 돌아본다. 그는 이제 상처만 빼놓고는 몸도 자세도 옛날처럼 당당하다. 턱을 안으로 끌어당기더니 사내가 경멸하듯 입을 연다.

"죽어 있는 꼴이 볼 만다더군. 반가운 사람끼리 얼싸안듯 둘이 서로 마주 보구 껴안았어."

"껴안다니, 누가 누굴 껴안아요?”

"짐승하구 영감하구 마주 꽉 껴안구 있더라니까,"

"마주보구요?”

"어떻게 단단히 껴안았던지, 풀어 패는 데두 장정 둘이 애먹었네"

대화가 끊어진다.

차가 마을 밖 비탈길을 오르느라 요란하게 머플러를 울린다. 사내가 한 손을 들어 자기 왼쪽 볼을 조심스레 어루만진다. 그의 볼에는 기다란 상처가 딱딱하게 아물어 긴 갑충처럼 붙어 있다. 청년이 다시 사내를 향해 조심스레 말을 묻는다.

"범이 참 몸 어딘가에 커다란 상처가 있었다면서요?”

"겨드랑 밑일세. 부락민들 말로는 덫에 치인 상처라더군."

"크던가요, 상처가?”

"고름이 뼛속까지 가득 찼어, 어떻게 그런 몸으로 사람을 해쳤는지 알 수가 없네."

차가 비탈길을 다 올라와 후미진 산굽이를 돌아간다. 청년이 다시 뭔가를 발견한 듯 손을 들어 차창 밖을 가리킨다.

"사장님, 저 꼴들 좀 보십쇼. 피난 갔던 사람들이 이제야 모두 제 집들을 찾아가는 모양입니다. 아마 오늘부턴 두 다리 쭉 뻗구 마음 편히들 잘 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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