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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단편 소설252

17. 집 집-윤흥길 아버지의 진면목이 가장 여실히 드러나기는 아무래도, 도시 계획에 저촉된다 하여 우리 집이 강제로 철거당하던 그때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물론 전에도 가족들이 차마 낯을 못 들 정도의 해괴한 짓을 사람들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해낸 적이 한두 차례가 아니었다. 그러나 힘센 시청 인부들이 무지막스럽게 휘두르는 갈고리와 해머질에 의하여 그래도 내 집이라고 정을 붙여 살던 그 판잣집이 장작더미처럼 폭삭 주저앉아버리는 비극의 날을 맞아 아버지가 남긴 유명한 공무 집행 방해의 일화에 비하면 그 따위 것들은 한낱 애교에 불과했던 셈이다. 우리는 창피해서 정말 얼굴을 가리고 다녀야 할 판이었다. 사람들이 우리 형제만 보면 손가락질을 해대며 아버지에 관해서 이러쿵저러쿵 출처 불명의 소문까지 덤으로 붙여 쑤군거리.. 2022. 3. 3.
100. 내일의 경이 내일의 경이 -윤흥길 어떤 퇴물 복서 남향한 창문에 드려진 어둠발로 보면 엔간히 한참 자고 난 뒤끝인 듯했다. 그러나 아직도 온몸 골골샅샅에 깝북 밴 채 응어리로 남아도는 한 주일의 피곤의 양으로 보아서는 이제 겨우 막 눈을 붙이려던 참인 듯도 싶었다. 고놈의 텔레비전이 노상 말썽이었다. 텔레비전에 관한 한 아내와 아이는 물과 불이었다. 아내는 쫄쫄 쥐어짜는 연속극과 어느새 죽고 못 사는 처지였다. 고놈의 바보상자가 코허리가 시큰하게 울려주는 동안이면 아내는 주부 입장에서 마땅히 긁어야 할 바가지도 까맣게 잊기 일쑤였다. 반면에 아들녀석은 또 스포츠 중계방송 쪽을 군것질 이상으로 즐겨했다. 중계 중에서도 특히 권투를 무지무지하게 좋아해서 닭싸움같이 싱겁게 끝나는 국내 순위 결정전이건 국제적인 대시합이건간.. 2022. 2. 26.
99. 내 우상 쓰러지다 내 우상(偶像) 쓰러지다 유재용 노트 겉표지에 씌어진 제목은 -포로가 된 왕자-였다. 삼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제목만은 내 기억에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국민학교 육 학년 때였다. 학교에서 돌아와 여름철 내 공부방으로 쓰고 있는 마루방에 들어가 앉은뱅이책망 위에 책가방을 올려놓으며 책상 옆을 무심코 내려다보니 빈 사과궤짝 속에 어지럽게 쌓아놓은 헌책 나부랑이 위에 낯선 대학 노트 한 권이 얹혀 있었다. -포로가 된 왕자-. 겉표지에 큼직큼직한 잉크 글씨로 이렇게 씌어 있었다. 나는 노트를 집어들고 겉장을 들쳤다, 내 눈에 부담을 주지 않을 만큼 굵직하고 뚜렷한 잉크 글씨가 줄을 따라 정연하게 늘어서 있었다. 나는 읽기 시작했다. -푸르기만 나라의 차칸 왕자가 알찬 나라의 예러 공주를 만나려고 먼 길을 .. 2022. 2. 26.
98. 날개 또는 수갑 날개 또는 수갑 -윤흥길 회람. 조국의 번영과 사(社)의 발전을 위하여 오늘도 불철주야 산업 일선에서 분투 노력하시는 사우 각위. 일취월장하는 우리 동림산업의 기개를 대외에 과시함은 물론 사우간에 일체감을 조성하여 단결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 데는 무엇보다 마땅히 제복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비등하여 왔던 바, 회사를 내 몸같이 아끼고 사랑하시는 동림가족 여러분의 충정 어린 권고와 건의를 그간 예의 검토하신 사장님께서는 금번 이를 십분 인정하시어 가칭 사복제정 준비위원회를 발족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사우 여러분께서도 주지하다시피 사복이 그간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생산부에서는 이미 오래 전서부터 직위의 고하를 불문하고 똑같은 제복을 착용하고 실무에 임함으로써 타부서에 비해 현격한 단결력을 발휘하여 생산성.. 2022. 2.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