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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4137

미늘 미늘 / 유진선 별이불이 총총하게 깔렸다. 오늘따라 늑장을 부리는가, 달은 아직 보이지 않고 서늘한 어둠만 가득하다. 늦더위가 유난하던 며칠 전과는 달리 어느새 가을이 덥석 안기는 것만 같다. 오랜만에 근처 사는 오빠 내외와 낚시를 갔다. 반짝이는 물비늘이 눈부시다. 낚싯대를 펼치고 평평한 곳을 찾아 앉았다. 치장하지 않은 주위 풍경은 흑백사진마냥 정겹고, 새우 미끼의 비린내와 깻묵 냄새가 순식간에 수십 년을 거슬러 간다. 어릴 적 기억과 몇 년 전 일들이 뒤섞여 일상인 듯 익숙하다. 어릴 때처럼 오빠 옆에 바싹 붙어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데 뭔가 조금씩 대화가 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와 조카를 헷갈려하고 앞뒤 없는 이야기를 불쑥 내뱉는가 하면 화장실을 간다면서 주저 없이 물로 걸어 들어가기도 했다. .. 2022. 12. 4.
대구탕을 끓이는 시간 대구탕을 끓이는 시간 - 정희승 회사일로 가족과 떨어져 지방에서 장기 체류하던 때가 있었다. 주말에는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었지만 주중에는 회사에서 마련해준 변두리 아파트에서 홀로 지내야 했다. 돌이켜보면 퍽 외롭고 힘든 시기였다. 그때만큼 가족이 소중하게 느껴졌던 적도 없었다. 일을 마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돌아오면, 나를 맞아주는 것은 가족이 아니라 불 꺼진 썰렁한 방이었다. 괴괴한 어둠 속에 꼭 닫혀 있는 현관문 앞에 설 때마다 왜 그렇게 낯설고 외롭게 느껴졌는지. 시한을 맞추기 위해 하루 종일 바동거리다 온 날이나 일이 잘 풀리지 않는 날, 또는 어쩔 수 없이 양심을 져버리면서까지 내키지 않는 일을 하고 돌아온 날이면 더욱 기분이 울적했다. 그때마다 가정이란 한 남자의 초라한 하루를 늘 용서해.. 2022. 8. 31.
두근두근 두근두근 - 정희승 성긴 눈발이 휘날리던 날, 너는 아픈 울음을 허공에 길게 남기며 산모통이를 돌아 사라졌지. 붉은 깃발을 접어든 차장은 이미 역사로 들어섰지만, 나는 여전히 플렛폼에 서 있었다. 잘 살아, 하는 말을 하지 못했으므로, 그 자리에서 오래도록 손을 흔들고 있었다고 할밖에. 모든 이별은 쉽게 잊히는 걸 두려워한다. 한때 사랑했던 연인들은 헤어지면서 으레 이렇게 말하지. 잊지 말자. 죽는 날까지. 어쩌면 우리도 그랬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대신 너는 점점 멀어지면서도 네 자신을 끊임없이 나에게 보냈다. 울먹이는 너를,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끼는 너를, 발에 전해오는 진동으로 느낄 수 있었다. 두근두근 나를 흔들며 왔던 너는, 결국 두근두근 나를 흔들며 떠났다. 어지럽게 휘날.. 2022. 8. 31.
어느 오후의 평화 어느 오후의 평화 - 정희승 대화할 때 서로 암묵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대상이나 사물은 보통 문장에서 생략한다. 정황으로 알 수 있다면 주어나 목적어는 굳이 언급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고 애써 완전한 문장으로 말을 계속하면 오히려 대화가 껄끄러워진다. 우리말의 중요한 특징이다. 점심을 먹다가 아내가 묻는다. "부쳤어요?" 역시 문장의 주요 성분을 생략한다. 말하지 않아도 내가 미루어 짐작할 거란 의미이다. 아내가 묻는 내용을 반듯한 문장으로 재구성해 보면, '오늘 군에 있는 큰애에게 소포를 부쳤어요?'쯤 되겠다. 오늘이나 큰애, 소포 등은 서로 묵인하는 것이므로 굳이 들먹일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결국 궁금한, '부쳤어요?'라는 동사만 남겨 놓는다. 덧없이 사라지는 행위, 즉 부치는 것을 직접 보지 못했으.. 2022. 8.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