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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4

러일전쟁 5 황해해전과 울산해 해전 일본육군은 뤼순요새에 대해 3월 상순까지 감시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후 3월 14일에 북상하는 2개 군의 후방에 유력한 러시아군 전력을 방치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2개 사단으로 구성된 공성군(攻城軍)을 편성하기로 결정했다. 허나 해군측으로선 육군의 원조없이 해군 독자적으로 뤼순의 처리를 희망했기에 사전 조정의 단계에서 육군의 후방원조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뜻을 가끔씩 대본영 해군참모를 통해 전달했다. 4월 6일에 이루어진 육군의 오오야마 이와오(大山巌) 참모총장, 고다마 겐타로(児玉源太郎)차장과 해군 군령부 차장인 이주인 고로 (伊集院五郎)의 합의 의결문에는 [육군이 요새공략을 실시하는 것은 해군의 요청에 의함이 아님]이라는 한 문장처럼, 4월에 들어서도 해군은 독.. 2021. 9. 25.
러일전쟁 3 인천해 해전과 다섯 차례의 뤼순항 공격 1904년 2월 4일, 일본은 어전회의에서 해전을 결의하여 육해군에 대한 특명이 내려져 6일부터 작전발동이 명령되어졌다. 5일 17시에 연합함대 사령관이던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는 발신명령을 받고서 6일 1시에 사세보에 집결했던 함대의 간부를 전함 미카사(三笠)에 모이도록 해서 회의를 열었다. 9시에 출격한 연합함대는 7일에 조선 북서쪽의 소청도 부근까지 진출할 예정이었는데, 이와 병행해 육군 제 2사단의 제 1진 2,200명을 태운 수송선 3척의 호위와 육군의 상륙예정지인 인천을 확보하기 위해 제 2함대 제 4전대(나니와, 다카치호, 니다카, 아카시)를 분파함대로 인천으로 보냈다. 2월 6일 아침, 연합함대는 사세보 군항을 출격해 제 1전대(전함 미카사, 아.. 2021. 9. 23.
러일전쟁2 러일전쟁 - 1904년 ~ 1905년 일본해군 연합함대의 편성 및 작전준비 러일전쟁 개전에 대비하여 일본의 작전은 해군 제 1함대와 제 2함대로 뤼순(旅順)에 있는 러시아 태평양함대를 봉쇄하고 제 3함대로 쓰시마 해협을 막아 제해권을 확보한 다음, 그 후 육군이 제 1군을 조선에 상륙하게 하여 조선에 주둔중인 러시아군을 몰아내고 제 2군으로 랴오둥(遼東)반도로 교두보를 확보한 후 뤼순을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제 3, 4군을 더하여 4개 군으로 만주평야에서 러시아군 주력을 빨리 섬멸한 다음 다시 연해주로 진격하여 블라디보스톡의 공략까지 상정했다. 해군에 의한 러시아 태평양함대의 섬멸은 유럽에서 이동이 예상되어지는 발트(발틱)함대의 도착전까지 완료하는 것이었는데 일본의 군령기관이 육해군을 병렬.. 2021. 9. 23.
러일전쟁 러일전쟁의 배경과 일본의 전쟁준비 대한제국이 청국에서의 책봉체제에서 이탈한 후, 만주를 세력하에 두고있던 러시아는 한반도에서의 잇권을 노리고 남하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고종을 통해 매입한 종성과 경원의 광산채굴권과 조선 북부의 삼림벌채권, 관세권 등, 국가기반을 취득하여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을 늘려갔는데,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이 이를 매입하며 만회에 나섰다. 처음에 일본은 외교정책으로 충돌을 피하려고 했지만 러시아는 강대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일본에 압력을 높여나갔다. 이에 일본은 1904년(메이지 37년) 2월 23일, 국외중립선언을 한 대한제국에서의 군사행동을 가능하게 하기위해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였고, 8월엔 제 1차 한일협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재정, 외교에 고문을 두는 .. 2021. 9.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