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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단편소설2122

38. 탈향 탈 향 -이호철 하룻밤 신세를 진 화찻간은 이튿날 곧잘 어디론가 없어지곤 했다. 더러는 하루 저녁에도 몇 번씩 이 화차 저 화차 자리를 옮겨 잡아야 했다. 자리를 잡고 누우면 그런대로 흐뭇했다, 나이 어린 나와 하원이가 가운데, 두찬이와 광석이가 양 가장자리에 눕곤 했다. 이상한 기척이 나서 밤중에 눈을 떠 보면. 우리가 누운 화찻간은 또 화통에 매달려 달리곤 하였다. "야야. 깨 깨, 빨릿,,,,,,." 자다가 말고 뛰어내려야 했다. 광석이는 번번이 실수를 했다. 화차 가는 쪽으로가 아니라 반대쪽으로 뛰곤 했다. 내리고 보면 초량 제4부두 앞이기도 했고 부산진역 앞이기도 했다. 이 화차 저 화차 기웃거리며 또 다른 빈 화차를 찾아 들어야 했다. "야하, 이 노릇이라구야 이건 견디겐,' “---." "에.. 2022. 5. 18.
124. 할머니의 죽음 할머니의 죽음-현진건 ‘조모주 병환 위독’ 3월 그믐날 나는 이런 전보를 받았다. 이는 xx에 있는 생가(生家)에서 놓은 것이니 물론 생가 할머니의 병환이 위독하단 말이다. 병환이 위독은 하다 해도 기실 모나게 무슨 병이 있는 게 아니다. 벌써 여든 둘이나 넘은 그 할머니는 작년 봄부터 시름시름 기운이 쇠진해서 가끔 가물가물하기 때문에 그 동안 자손들로 하여금 한두 번 아니게 바쁜 걸음을 치게 하였다. 그 할머니의 오 년 맏인 양조모(養祖母)는 갑자기 울기 시작하였다. “아이고--- 이승에서는 다시 못 보겠다. 동서라도 의로 말하면 친형제나 다름이 없었다--육십 년을 하루같이 어디 뜻 한 번 거실러 보았을까---.” 연해연방 이런 넋두리를 섞어가며 양조모는 울었다. 운다하여도 눈 가장자리가 붉어지고 목소.. 2022. 4. 14.
123. 학 학(鶴)-황순원 삼팔 접경의 이 북쪽 마을은 드높이 개인 가을하늘 아래 한껏 고즈넉했다. 주인 없는 집 봉당에 흰 박통만이 흰 박통만을 의지하고 굴러 있었다. 어쩌다 만나는 늙은이는 담뱃대부터 뒤로 돌렸다. 아이들은 또 아이들대로 멀찌감치서 미리 길을 비켰다. 모두 겁에 질린 얼굴들이었다. 동네 전체로는 이번 동란에 깨어진 자국이라곤 별로 없었다. 그러나 어쩐지 자기가 어려서 자란 옛마을은 아닌 성싶었다. 뒷산 밤나무 기슭에서 성삼이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거기 한 나무에 기어올랐다. 귓속 멀리서, 요놈의 자식들이 또 남의 밤나무에 올라가는구나, 하는 혹부리할아버지의 고함소리가 들려 왔다. 그 혹부리할아버지도 그새 세상을 떠났는가, 몇 사람 만난 동네 늙은이 가운데 뵈지 않았다. 성삼이는 밤나무를 안은 채.. 2022. 4. 14.
122. 폭군 폭 군 (暴 君)-홍성원 차가 강변에 도착했다. 해가 막 지고 있어서 강변이 온통 타는 듯한 놀빛이다. 일행 세 명이 차를 내려 빠른 걸음으로 강가로 다가간다. 햇빛에 바랜 횐 자갈들이 아래복 강가로 질펀히 깔려 있고 일행들이 서 있는 발 밑의 자갈들은 작은 둑처럼 약간 높게 쌓여 있다. 둑은 붉은 황톳길에서 시작되어 살얼음이 잡힌 강가에까지 연결되어 있고 강물과 둑이 맞닿은 곳에는 굵은 말뚝들이 장방형으로 박혀 있다. 말뚝으로 된 장방형 울타리 속에 자갈들이 황토와 섞여 제단처럼 편평히 다져졌다. 배가 땋고 떠나기 좋도록 나루터에 만든 발판이다. 강은 수심이 얕은 탓인지 물보라를 일으키며 아주 빨리 흘러간다. 아직 본격적인 추위가 닥치지 않아 강심(江心)에는 얼음이 얼지 않았다. 자갈이 드러난 얕은 강.. 2022. 4.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