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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인간(이응준)14

수필인간11 타투가 있는 그 사내는 왜 서쪽으로 갔는가?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영화가 있다. 1989년, 한국영화계와는 아무 관련 없이 하늘에서 혼자 뚝, 떨어졌던 영화. 조용한 천둥벼락 같은 영화. 감독을 비롯한 대부분의 것들이 수수께끼였던 영화. 그 이후로도 비밀의 안개가 채 다 걷히지 않고 있는 영화. 어쩌면 오히려 더 깊은 질문들 속으로 멀어져가고 있는 영화. 한국대중의 불면증 치료에 큰 도움이 되었을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이렇듯 내용보다는 제목이 세상을 지배하는 경우가 있다. 제대로 읽은 이가 몇이 안 돼도, 혁명이라기보다는, 혁명에 관한 영원한 분란을 일으키는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처럼. ‘인간’이 뭔지도 모르면서 ‘인간적인 것'들을 우기고 따져가며 서로 싸우고 살육하.. 2021. 9. 20.
수필인간10 환란중인 지구인들을 위한 낭만적 유서 작성 교본 어제는 「저녁의 아름다운 노래」라는 시를 한 편 썼고, 오늘은 아직은 제목을 정하지 못한 노랫말 하나를 썼다. 저녁 숲을 거닐며 바다의 거대한 고래를 상상하는 소년에 대한 이야기가 그 시가 되었고, “슬픈 꿈을 꾸었으니”라는 말로 그 노랫말은 시작된다. 그리고 생활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이런 일들이 내 천직이라는 현실이 예나 지금이나 나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뭐 이런 엉터리 주술사(呪術師)도 다 있나 싶은 것이다. 다만 이런 생각은 가져 본다. 만약 내가 ‘남몰래’ 좋은 종교인이 될 수 있다면, 나는 나의 뛰어난 군인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람이 하는 짓들 가운데 뭐가 방황이고 뭐가 모색인지 나는 여전히 헛갈린다. 천사인 척하는 인간들이.. 2021. 9. 20.
수필인간9 사랑으로서의 질병이여, 사막과 별들의 바다여 손오공은 내 친구다. 한국 나이로 이제 서른한 살이니, 정확히 젊은 사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손오공’은 손오공 군의 이름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의 주변사람들이 그를 부를 적에 사용하는 별명도 아니다. 오공은 자신을 누가 손오공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 아무도 몰래 나 혼자 속으로만 그를 손오공으로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내게는 이러한 경우가 종종 있다. 내 지인들 가운데 저팔계도 있고 사오정도 있고 삼장법사도 있는 까닭은 그래서다. 이 작은 글에서 오공 군의 리얼 네임을 밝히지는 않겠다. 세상 모두가 남의 책에 자기 이름이 박히는 것을 무조건 좋아는 ‘관심종자’라는 보장이 없는 법이고, 차라리 안 하고 말지 이런 일을 두고서 당사자에게 일부러 .. 2021. 9. 20.
수필인간8 잘못된 세계를 가로지르는 아름다운 밤길 창가의 그림액자가 쓰러져 옷깃을 여미듯 창문을 닫게 되는 밤. 가을의 태풍이 서서히 바다 너머로 사라드는 소리를 듣는다. 머지않아 겨울이 오리라. 혹독한 겨울이 오리라. 술에 취한 밤이면 아버지 어머니가 이 서울 어디엔가 살아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무엇이 살아 있는 것이고 무엇이 죽은 것인지 확신이 서질 않는다. 원하는 바가 다 이루어지는 삶이 있다면 그 인생에는 기쁨이 없을 것입니다, 라고 하나님께 기도드린다. 어느 나무의 씨앗 하나를 은접시 위에 올려놓은 채 물끄러미 바라보곤 한다. 저 작디작은 씨앗 안에 거대한 나무가 잠들어 있다는 사실은 내게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은접시 위에 놓인 거대한 나무의 작디작은 씨앗 한 톨은 있는 그대로.. 2021. 9.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