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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신춘문예 작품(소설, 수필, 시 등)15

퓨즈 끊기니 퓨즈 끊기니 / 허숙영 [ 제4회 선수필 문학상] 나, 개망초 우거진 밭 어귀에 초연히 누운 냉장고일세. 무슨 헛소리냐고. 자네 기억하는가. 동네 사람 누구나 스쳐가는 길 가장자리에 나를 내다버린 날을. 누군가 얼핏 보더니 꼭 새하얀 관 같다고 하더구만. 그러고 보니 잦은 비에 웃자란 잡풀들이 에워싸 조문하는 것 같은 신세가 되어버렸지 뭐야. 아니지. 으늑하게 누울 날들을 기다렸던 만큼 잘강이는 바람 소리를 자장가삼아 편안하게 지내고 싶었다네. 한때는 주부들의 성소였던 부엌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 고 있었지. 집안의 번영을 위해 내가 할 일이 좀 많았나. 제일 중요한 먹을거리의 부패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네. 그뿐인 줄 아나. 집안 사람들 입맛에 비위를 맞추고 지켜 주느라 더 차갑게 굴 수밖에 .. 2023. 1. 12.
슬로우슬로우 퀵퀵 슬로우슬로우 퀵퀵 / 서은영 [2023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하물며, 골목 바람도 리듬을 탄다. 느긋한 바람이 강아지풀을 쓰다듬으며 살랑거리다가도 남쪽 동백꽃 내음을 골목으로 부려 놓을 만큼 세차게 불기도 한다. 빨랫줄에 널려있는 시래기가 왜바람 따라 바스락거린다. 거칠어진 바람에 돌쩌귀 빠진 철대문이 덜커덩덜커덩 녹을 닦는다. 바람의 장단에 골목은 부풀었다가도 이내 고요한 풍경이 된다. 사람이 만드는 바깥바람에도 골목은 술렁대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잠잠해진다. 후미진 골목의 리듬이다. ‘슬로우슬로우 퀵퀵’ 휘파람 불 듯 발음해야 하는 이 말을 내가 맨 처음 들었던 때는 골목이란 골목을 죄다 이어 나만의 세상을 만들던 어린 날이었다. 바다에서 불어와 골목을 휩쓸다가 숲을 타고 산등선 너머로.. 2023. 1. 12.
내 작품의 누드모델 내 작품의 누드모델 / 허창열 [ 2023년 전라매일 신춘문예 당선작] 창안으로 햇빛이 들어온다. 벽에 옷이 걸려있다. 날지 못한 새처럼 벽에 달라붙어 있다. 화요일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난 후 남편에게 내 작품의 누드모델이 되어 달라고 요청을 한다. 남편은 흔쾌히 허락을 해 준다. 나는 화요일마다 특별한 작품을 만든다. 특별한 작품이니 힘도 특별히 많이 든다. 그래서 나는 화요일 아침이 되면 몸 준비를 단단히 한다. 생각나면 먹는 비타민도 꼭 챙겨 먹고, 밥이나 과일 등 먹으면 힘이 나겠다 싶은 것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다 먹는다. 마음 준비도 마찬가지다. 오늘도 잘 만들 수 있다고, 재미있게 만들자고, 맛있는 작품을 만들자고 스스로를 응원한다. 자, 이제 작품을 만들어 보자. 누드모델이니까 발가벗기는.. 2023. 1. 12.
골죽 골죽 / 지영미 [ 2023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수직으로 곧게 뻗은 대나무 군락, 속을 비운 대들이 하늘을 찌를 듯하다. 흘러넘치는 푸르른 본능 사이사이로 햇살이 부서져 내린다. 댓잎에 튕긴 빛이 눈이 부시도록 반짝인다. 바람이 불자 일제히 우듬지를 출렁이며 허공에 부서진 소리를 쓸어 담는다. 대나무들은 하룻밤에도 훌쩍 키가 자란다. 늦게서야 자라는 대는 죽죽 뻗고 싶지만, 햇볕은 먼저 큰 친구들이 차지한다. 시간이 갈수록 초라한 모습이 도드라진다. 버스럭거리는 낙엽만이 골골이 파인 상처를 감싸줄 뿐이다. 속 깊은 자괴감에 비하면 겉면을 타고 내리는 고통쯤은 참을만하다. 제때 자라지 못한 몸뚱이는 결핍의 흔적을 고스란히 남긴다. 시간이 갈수록 마디를 파고드는 골이 깊어진다. 생장의 마디마다 사연을.. 2023. 1.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