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성수필가 작품9

아버지의 뒷모습 아버지의 뒷모습 / 김영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막 나서려는데 무엇인가 휙 스치더니 시야에서 사라진다. 아파트 출구로 향하는 벽에 막혀 뚜렷하지는 않지만 분명 눈뿐만 아니라 가슴에도 스쳤다. 빠른 걸음으로 출구를 나선다. 사는 게 궁금해 친정아버지가 오셨다 되돌아가시는 것이 아닌가 하여 마음이 급했다. 저만치 앞에 허연 머리에 등이 살짝 굽은 할아버지 한 분이 느린 걸음을 재촉하신다. 반가움에 달려가려던 마음을 심호흡으로 진정시킨다. 이층에 사시는 교수님이었다. 이층이라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을 이용하시기에 가끔 뜰에서 마주치곤 한다. 그럴 때면 반갑게 인사를 받아주신다. 늘 등에는 테니스라켓이 든 가방을 짊어지셨는데 얼마 전부터는 빈 몸이시다. 몹쓸 병과 싸우는 것으로 안다. 흰 머리카락은 늘었고, .. 2023. 8. 6.
고사리, 그 생 이애현 한창 제철이다. 비 오고 나면 훨씬 윤지겠다는 말에 주변 고사리 밭이라는 곳을 둘러보고 돌아왔었다. 그러고 보니 올핸 여느 해와 달리 고사리를 부른다는 고사리 장마도 없었다. 아홉 번을 꺾여도 다하지 않는 질긴 생의 의미를 가져 제사상에 꼭 오르는 산나물이라 한다. 그 의미에 닿고 싶음일까. 찔레꽃이 하야니 흐드러지게 필 때가 고사리도 한창이란 말을 들은 적도 있고, 우스갯소리로 사람 하나에 고사리 하나란 말도 있다. 아닌 게 아니라 고사리 꺾으러 타고 온 차량으로 새벽부터 길 가장자리로 즐비하게 주차해 있는 모습을 보니 많은 사람들이 나선 것이 맞다. 어둑새벽에 출발하여 도착한 장소엔 어둠이 채 걷히지 않아 사물 분간이 어려웠다. 새벽이기도 하지만 낮과 밤의 기온 차로 싸하니 추웠다. 차에서 기.. 2021. 10. 12.
고사목 송명화 바싹 말라버렸다. 검붉은 빛 도는 마른 줄기가 둥근 수형 그대로 박제되어 버렸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몇 십 년을 함께 한 성숙한 나무가 며칠 사이에 이럴 수가 있을까. 알아봐도 원인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황매와 철쭉 사이에서 어깨를 겯고 출입 때마다 내 눈도장을 받던 서향 나무가 아니던가. 조선시대 강희안은 《양화소록》에 "한 송이 꽃이 터져 나오면 향기가 온 뜰에 가득하고 꽃이 활짝 피면 그윽한 향기가 십 리나 멀리까지 퍼진다."라고 적었다. 오랜 세월 그리도 향 보시를 해주더니, 지쳤던 것일까. 내 키만 한 서향 나무가 차지한 곳은 우리 집 출입구 옆 화단이다. 곁방살이, 전세살이를 거쳐 조그마한 내 집을 마련했을 때 얼마나 들떴던가. 매일 같이 쓸고 닦고 반짝거리는 집을 보며 부족함이 없.. 2021. 10. 11.
아침에 쓰는 일기 유인경 초등학교 때 숙제로 쓰기 시작한 일기를 60세가 넘은 지금까지 꾸준히 쓰고 있다. 아직도 ‘고전적’으로 공책에, 볼펜이나 플러스펜으로 꾹꾹 눌러 쓴다. 작가들에게 일기는 문장력 연마의 수단이다. 일상의 에피소드는 작품의 토대가 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정치인들의 일기는 사료로서 가치를 지닌다. 어린 소녀 안네 프랑크의 일기는 기자들의 취재나 학자들의 연구로도 닿지 못했던 엄혹한 상황 속 유대인 가족의 내밀한 고통을 전세계에 알려줬다. 평범한 소시민인 나의 일기는 단순히 생활을 기록하는 데 그치지만, 내게 엄청난 치유 효과를 준다. 어린 시절엔 ‘책을 읽고 엄마와 시장에 다녀왔다’는 등의 단순한 일상을 억지로 적었다면, 나이가 들면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보다 내 마음 상태와 세상, 주변을 바라보.. 2021. 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