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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단편소설389

90. 우리들의 조부님 우리들의 조부(祖父)님 현길언 1 할아버지가 이상해지기 시작한 것은 엊저녁부터였다. 여든 다섯 나이에도 할아버지는 한시도 쉬지 않고 무엇을 하면서 지냈다. 집 주위 자잘한 일들을 손보기도 하였고, 어떤 때는 들이나 밭에까지 나가기도 하였다. 아버지가 없는 집안 살림이긴 하나 할아버지까지 일해야 할 처지는 아닌데도 늘 그렇게 무엇인가를 하면서 지냈다. 닷새 전에는 손자인 나를 데리고 마을 안을 한 바퀴 돌면서 가을 곡식과 감귤 밭들을 돌아보고 오더니 그만 자리에 눕고 말았다. 집안에서는 노인이 무리를 한 때문이라고 생각하다가, 이틀을 넘기면서부터는 나이도 나이어서 세상을 뜰 때가 가까웠다고들 수군거렸다. 그래도 읍내 병원으로 모시기 위해 경운기까지 준비하였으나 할아버지는 끝내 듣질 않았다. 그뿐이 아니다... 2022. 5. 29.
89. 유치장에서 만난 사나이 유치장에서 만난 사나이 / 김사량 왕백작 우리들은 부산발 신경행(新京行) 급행열차 식당 안에서 비루병과 일본술 도쿠리를 지저분히 벌여 놓은 양탁을 새에 두고 앉았다. 마침 연말휴가로 귀향하던 도중 우리는 부산서 서로 만난 것이다. 넷이 모두 대학동창이요 또 모두가 같이 동경에 남아서 살고 있었다. 한 사람은 광고장이, 한 사람은 축산회사원, 한 사람은《조선신문(朝鮮新聞)》동경지국 기자, 그리고 나. 우리들은 기실 대학을 나온 이래 이렇게 오랜 시간 마주앉아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래 우리는 만취하기까지 술잔을 기울이며 여러 가지로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드디어 술에도 담배에도 이야기에도 시진하였다. 그때에 신문기자는 이 열차에 오를 적마다 머릿속에 깊이 박혀 사라지지 않는 기억이 하나 있노라 하며 다.. 2022. 5. 29.
88. 젖은 것들은 모두 따뜻하다. 젖은 것들은 모두 따뜻하다 -김 봉 순 ​ ​ 고스란히 모여 있는 햇볕이 아까워 순간 웃옷을 훌렁 벗는다. 옷을 벗는 것만으로 성이 차지 않아 치마도 내린다. 지난 생일에 딸년이 사준 내복까지 벗고 팬티만 걸치곤 햇볕 더미에 들어가 등을 내민다. 개미가 기어오르듯 등짝이 자글자글 간질거린다. 너무 간지러워 어깨를 들썩이며 그만 까르르… 웃음소리가 밖으로 새어나온다. 잘 여문 볍씨 같은 햇볕이 거실 바닥에서 애벌레처럼 곰지락거린다. 나는 두 손을 쭉 뻗어 햇볕 속으로 밀어 넣는다. 손등이 간지러워 맞대고 천천히 비벼본다. 김치전을 부치듯 손바닥을 햇볕 속에서 번갈아 뒤집어 본다. 엉덩이를 들썩거려 햇볕 안으로 옴팡 들어가 앉는다. 얼굴이며 가슴이 따뜻하다. 창문을 통해 거실 바닥으로 햇볕이 마구 쏟아져 들.. 2022. 5. 29.
87. 착하거나 욕먹거나 착하거나 욕먹거나 김 봉 순 ​ ​ 명절이 돌아올 때 마다, 각종 매스컴에서는 너스레를 떨며 주부들의 피로감을 역설했다. 아니 위로하기는커녕 부추기는 현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당신들 말야, 명절이 다가오면 시댁도 가기 싫고 몸도 아프고 그렇죠, 아프지 않아요? 어? 아파야 하는데. 그쵸? 거봐요, 맞잖아요, 아픈 거… 엄청 심란할걸요!’ 우리의 동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성공 조건은 의외로 간단하다. 아니 이걸 성공이라고 표현하기엔 좀 애매하지만, 내가 싫으면 타인도 싫을 것이고 내가 좋으면 상대방도 좋은 것, 즉 역지사지가 정답이다. 우리의 모든 문제는, 흔히 간과할 수 없는 문제를 쉽게 간과한다는 데서 온다. 성격이나 입맛 · 가치관 등 같은 게 하나도 없는 - 모두 다른 개성을 가진 사람들과의 .. 2022. 5. 29.